중국사 100장면 - 47. 약탈자에서 지배자로

원 왕조의 성립(1271)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족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숙제가 하나 남겨졌다. 그것은 어떻게 스스로를 잔인한 정복자에서 고도의 지배자로 변신시켜, 고도의 문명국들을 다스리는가 하는 문제였다.

 

몽고족은 초원의 목동이자 전사였고, 정복민인 중국은 세계 최고의 문화전통을 자랑하는 나라였다. 게다가 몽고족은 숫적으로도 열세를 면치 못하는 실정이엇다. 그 과제는 참으로 오랜 전통 끝에 달성되었으나, 또한 그것을 몽고족의 건강한 풍습을 해쳐 마침내 제국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순수 유목민인 몽고인들에게 중국의 농경문화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생소한 것이었다. 오고타이가 지배하던 어느 날, 이렇게 진언하는 몽고의 중신이 있었다.


'몽고제국에 있어서 한인들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차라리 한인들을 모두 그들의 농경지에서 쫓아내고 그곳을 초원으로 만들어 소와 양을 방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몽고인들의 중국 지배관을 바꾸어놓은 이가 야율초재. 그는 거란 황실 출신의 금나라 최고의 학자요 정치가로, 몽고가 금나라로부터 얻은 최고의 보물이었다.

 

그는 칭기즈칸으로부터 오고타이 때까지 30여년간 재상으로 활약했다. 그는 몽고인들에게 농토와 농민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토지가 생산해내는 풍부한 생산물을 세금으로 확보, 국가재정을 확충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외국인이었다.


1259년 몽케가 남송 정벌 도중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자, 대권을 두고 쿠빌라이와 아릭부게 간의 4년 여에 걸친 대립이 있었다.

 

몽고의 전통귀족들의 대부분은 아릭부게를 중심으로 결집했으나, 소수파에 불과했던 쿠빌라이가 중국대륙의 광대한 힘을 기반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는 일찍이 중국문화와 접촉했던 중국통으로, 그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몇 안되는 몽고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몽고인들은 전통의 고수와 중국화의 기로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었다. 그것은 쿠빌라이와 오고타이의 아들 카이두의 항쟁으로 지속, 그들은 죽을 때까지 20여년간에 걸쳐 대립항쟁했다. 실제로 4칸국 중에서 쿠빌라이의 동생 훌라구가 건설한 일 칸국만 제외한 모든 칸국들은 카이두를 지지하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몽고의 전통 도시 카라코룸을 두고, 제국의 근거지를 중국 내지로 옮겼다. 수도는 금의 수도였던 대도 북경으로 옮겨졌고, 1271년에는 국호를 '시초', 혹은 '근원'이라는 뜻의 '원'으로 정했다.

 

이는 중국의 고전인 <역경>에서 자구를 딴 것이다. 남송 정벌의 대장정이 다시 결행되고, 1279년에는 마침내 남송을 멸망, 몽고족은 중국민을 송두리째 정복한 최초의 민족이 되었다.


원제국은 중서성을 최고관청으로 하는 중국식 중앙관제를 약간의 손질을 가해 그대로 운용했다. 그러나 과거를 통해 관리를 뽑을 필요는 없었다.

 

대부분의 고위 관직자들은 몽고인 제일주의에 의거, 반드시 몽고인으로 충당되었으니, 과거가 실시된다 하더라도 몽고인으로부터 외면당해 단기적 실시에 그치게 마련이었다.


지방의 행정기구로는 예전의 주현제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부, 로를 설치했는데, 각 단위에는 다루가치라는 몽고인 감독관을 파견했다.

 

전지역은 10여 개의 지역으로 묶여지고, 각각 행중서성을 두었는데, 그 뜻은 중서성의 파견기관 정도의 의미이다. 이를 줄여서 행성, 더 뒷날에는 성으로 불리어졌다. 중국에서 성이 지방 행정구획으로 된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원은 백성들을 크게 4개의 신분으로 구별, 철저한 차등을 두어 다스렸다. 물론 최고의 신분은 몽고인. 몽고인 제일주의는 다수의 문화민인 중국인을 지배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제2신분은 색목인. 색목인이란 '여러 인종이 섞여 복잡하다'는 뜻으로, 서역 계통의 제종족을 일컫는다. 이들은 원의 제국 확장이나 중국 통치에 일찍부터 중요한 협력자 역할을 해왔다.

 

몽고인들에게는 이들이 중국문화와는 아주 이질적인 이슬람 문화권에 속해 있다는 것, 그리고 뛰어난 상업, 재정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아주 매력적이었을 거이며, 상업활동에 종사하던 이들도 몽고의 대제국 속에서 대상로가 확보되고 상업상의 이득이 확대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었다.


중국인들은 몽고의 지배 속에서 가장 커다란 차별을 받고 있었는데, 제 신분인 한인과 최하신분인 남인으로 구별되었다. 한인은 금의 지배하에 있던 화북의 중국인들로 말단의 관직에 봉직할 수 있었으나, 최후에 정복된 남송 지배하의 강남의 중국인들, 즉 남인에게는 그것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일찌감치 벼슬을 포기한 중국의 지식인들은 재야에 묻혀 시짓기를 즐기거나, 잡극이라는 새로운 문학분야를 개척, 민중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한편 단지 몽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생애에서의 모든 영화가 보장되었던 몽고인들은 점차 유목민족 특유의 강건한 기풍, 용맹한 군사력을 상실해갔다. 칸의 계승권 다툼은 갈수록 심화되어 성종에서 마지막 황제 순제 사이의 26년간에는 무려 8인의 제왕이 교체되었다. 게다가 황실의 라마교 신봉은 원제국의 몰락을 재촉했다.


라마는 '높은 이'라는 뜻이다. 라마교는 티베트의 토착신앙과 결합한 불교의 변종으로, 주술과 예언을 중시하는 밀교다. 라마교의 최초의 신자는 쿠빌라이로, 그는 티베트 원정에서 라마 승려 파스파의 설법에 감동하여 그의 열렬한 신도가 되었다.

 

티베트 문자를 변형, 제작한 파스파 문자는 몽고의 공문서에 사용되었으며, (라마승을 때리는 자는 그 손을 자르고, 이를 욕하는 자는 그 혀를 자른다)는 법령까지 재정되었다.

 

수백 회에 이르는 빈번한 라마교의 불사, 라마교의 방중술에 빠진 황실의 퇴폐적인 생활은 재정난을 더욱 악화, 지폐가 남발되니, 인플에의 격증 속에서 백성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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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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