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46. 초원의 폭풍 칭기즈칸

몽고의 유라시아 제패(13세기)

 


1161년 금나라에 세종이 즉위, 최성기를 구가할 무렵, 시베리아 남단 해발 1,400미터의 몽고 초원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테무진. '눈에 불이 있고, 얼굴이 빛나는' 아이. 그가 장차 몽고족을 통일. 유라시아를 제패하는 세계사상 최대의 제국을 이룩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전설에 의하면, 몽고족은 하늘에서 내려온 푸른 이리가 흰 사슴을 아내로 맞아 건설한 나라이다. 북방의 혹독한 추위와 거친 유목 생활은 그들을 강인한 체력과 끈질긴 인내심을 가진, 매우 독립적이고 용먕한 개인으로 키워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평생을 말 안장 위에서 생활했다.


테무진은 용맹한 몽고 부족장 예슈게이와 호겔론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그가 9살 때 아버지 예수게이는 타타르 족에게 독살당하고 말았다.

 

당시 몽고고원에는 몽고족 외에도 몽고계, 투르크 계의 여러 유목 민족들이 서로 각출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부적은 타타르, 메르키드, 케레이트, 옹구트, 나이만 등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테무진은 어머니 호겔론 슬하에서 고난에 찬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점차 장성하면서 부족 재건의 투지를 불태웠고, 그의 용맹함은 주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몽고고원을 통일해나갔다.


한번은 메르키드 부족에게 아름다운 아내 뵈르테를 빼앗겼던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예슈게이가 메르키드 청년의 아내 호겔론을 탈취해갔던 것에 대한 복수였다. 그때 예수게이는 호겔론의 미모에 반하기도 했지만, 유력한 부족의 신부를 얻는다는 것은 당시 부족간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한 방법이기도 했다.


마침내 1206년 몽고의 부족장들은 부족 연합회의인 '쿠릴타이'를 개최, 이미 백전의 경험을 가진 뛰어난 전략가로 성장한 테무진을 '칭기즈칸'으로 추대했다. 칭기즈칸이란 몽고어로 '강력한 군주'라는 뜻이며, 쿠릴타이는 집회라는 뜻이다.

 

이제 그가 태어난 한 부족의 명칭에 불과하던 몽고는 몽고고원 일대에 거주하는 종족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확대되었다.


그는 종래의 씨족제를 해체하고, 사회를 천호, 백호제로 재편했는데, 이는 금의 맹안, 모극제와 매우 유사한 것이다. 당시 총 95개의 천호 중 88개의 천호장에는 '나라를 함께 세우고 함께 고생해온 전사'가 임명되었고, 칭기즈칸은 피로써 다져진 충성스런 전사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지휘, 대정복을 수행해갔다.


1215년, 먼저 동으로 진격하여 금의 연경을 공략, 하남으로 밀어낸 칭기즈칸을 말머리를 서방으로 돌려 그야말로 질풍노도와 같이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해나갔다.


요의 망명정권 서요를 대신한 나이만 왕국이 쓰러졌고, 중앙아시아 최대 강국으로 사마르칸드에 도읍하고 있었던 호라즘 왕국이 쓰러져갔다. 1225년까지 남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에서 서로는 카스피해를 넘어 남러시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거의 전역이 몽고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귀향한 칭기즈칸은 1227년 마침내 서하를 무너뜨리고, 금으로 진공을 꾀하던 중 대정복으로 점철된 60여 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몽고족의 풍습은 매장 후 봉분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고향에 묻힌 그의 묘소는 확인할 길은 없다.


칭기즈칸에게는 정실 소생의 4아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툴루이가 있었는데, 그의 영토는 몽고풍습에 따라 이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대칸의 위는 오고타이, 그의 아들 구유크, 툴루이의 아들 몽케, 몽케의 동생 쿠빌라이에게 이어졌다.


칭기즈칸의 정복사업은 그 자손들에게 훌륭히 계승되었다. 오고타이는 1239년, 마침내 숙적 금을 멸망시켰고, 몽케는 1258년 세계 최고의 문명 발상지이자 고도의 이슬람 문명국인 서아시아의 압바스 왕조를 무너뜨렸다.

 

칭기즈칸의 5대 대칸 쿠빌라이는 1279년, 마침내 동아시아 최대의 문명국 송을 멸망, 제국의 최대판도를 이루었다. 그것은 동해에서 남러시아에 이르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다.


몽고군의 전술은 마치 초원에서 사냥을 할 때 포위망에 들어 있는 짐승을 압축하듯이 추호의 사정이 없었다. 정복당한 나라의 백성은 기술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잔인하게 살육되었다.

 

그들은 전진하는 몽구군의 후방을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 살육당하지 않은 정복민은 다음 전쟁터로 끌려나가 위험한 노역에 동원되는 등 몽고군의 방패막이로 쓰러져갔다.


몽고군이 지나간 도시는 철저히 파괴되어, 수천년 귀중한 문화 유산들이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져갔다. 몽구군의 말발굽 소리만 듣고도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각국의 처절한 항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욱 철저한 피의 보복뿐이었다.


몽고군의 이 가공할, 파괴적인 위력은 신출귀몰한 기마전술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나, 금을 통해 취득한 중국의 화약, 성벽 도시에 큰 돌을 쏘아넣는 투석기, 성벽을 무너뜨리는 특수 수레 등 신기술들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몽고의 대제국은 몽고 본토 및 중국은 황제의 직할령이 되고, 그 나머지 땅은 이른바 4칸국으로 나뉘어 다스려졌다. 남러시아에는 킵차크 한국, 서아시아에는 일 칸국, 중앙아시아에는 차가타이 칸국, 서북 몽고에는 오고타이 칸국이 건설되었다.


특히, 킵차크 칸국은 오고타이 때 주치의 아들 바투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바투의 폴란드, 헝가리, 실레지엔 등 유럽 대원정은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실레지엔 공 하인리히 2세는 1241년 발시타느 전투에서 전사했다. 유럽인들은 몽고군의 가공할 위력을 '신의 채찍'이라고 불렀다.


몽고의 대제국 속에서 동서의 문물은 매우 활발히 교류했으며, 몽고의 문화는 그들의 지배력이 뻗쳤던 유라시아의 각국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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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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