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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3.14 중국사 100장면 - 45. 여진족의 화북 지배. 북송의 멸망(1127년)

 

 

 

중국사 100장면 - 45. 여진족의 화북 지배 - 북송의 멸망(1127년)

 


만주에는 퉁구스계의 여진족이 널리 분포되어 반농반목의 부족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찍이 발해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이 무렵에는 요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들 중 이미 요의 지배하에 편입된 세력은 숙여진, 그렇지 않은 부족들은 생여진으로 불리었다. 생여진 중에 송화강 지류인 이르추흐 강 유역에 거처하던 완옌부가 추장 아골타를 중심으로 급격히 성장, 12세기 초 동아시아에 돌풍을 몰고왔다.


굳세고 용맹한 아골타는 요의 간섭에 공공연한 반기를 들고, 1115년에 독립적인 여진족 최초의 국가를 건설, 국호를 대금이라 칭했다. 금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여 요의 집압군은 송화강변에서 무참하게 대패했고, 금군은 요동 요서로 남하, 종횡무진으로 세력을 떨쳐나갔다.


금의 발전의 모태는 군사, 행정의 주축인 맹안, 모극의 제도에 있었는데, 여진족의 300호가 1모극으로, 다시 10모극이 1맹안으로 조직되었다. 1모극에서 100명의 군사가 뽑혀 1모극군이 되었고, 10모극군이 모여 1맹안군이 되었다.

 

이들은 군사, 행정이 일치된 맹안, 모극의 제도 속에서 유목민 특유의 강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맹안은 1000을 위미하는 여진어의 '민간' 모극은 족장의 뜻인 '무게'의 음역이다.


한편, 이무렵의 중국은 왕안석의 개혁도 실패하고, 당쟁은 격화, 급격한 국력의 쇠퇴기를 맞고 있었다. 휘종은 회화 등 문화적 재능으로는 유명하지만 정치에는 뜻이 없어 그가 신종의 아들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 틈에 채경 같은 처세술에 능한 관료가 환관 동관과 결탁, 온갖 부정 부패를 일삼고 있었다.


휘종은 도성 동북면에 인공산을 만들고 도시의 향락생활에 빠져 들어갔고, 채경과 동관은 이를 부추겨 전국의 기화요초와 괴석들을 수집하게 되니, 기석을 운반할 때, 민간집의 담장이 방해가 되면 담장을 허물고, 집이 방해가 되면 집까지 허물어버렸다고 한다.


1120년 송은 연운 16주를 회복할 심산으로 금과 연합, 요를 협공하기로 했는데, 방납의 난이 일어나 그 군대를 국내에 투입할 수밖에 없는 상활에 이르렀다.

 

방납은 강남의 분노한 백성들을 이끌고 한때 대운하의 종점인 항주를 점령하는 등 세력을 떨쳤다. 한편, 산동의 양산박에서는 송강 등이 출몰, 관군을 크게 괴롭혔는데, 이들이 바로 유명한 (수호지)에 등장하는 양산박의 108명의 호걸의 모델이다.


금군은 거의 독자적 힘으로 일거에 요의 본거지를 석권했다. 요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는 서쪽으로 도망, 한때 서하에 몸은 의탁했지만 1125년 금나라에 체포, 요는 건국 이래 210여년 만에 멸망했다.


송은 국내정치의 불안도 있고 해서 금나라와의 약속을 밥먹듯이 어겼고, 양국의 관계는 불안정했다. 일단 회군했던 금군은 다시 남하, 이듬해에는 송의 수도 변경을 함락시키기에 이르렀다.


당시 금의 군대가 도성에 육박했다는 보고를 들은 휘종은 신하들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금나라가 설마 우리 도성을 공략해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이 말을 마치고 기절하고 말았다. 백성들은 채경 등의 처벌을 요구하면서 결사대를 결성, 목숨을 버려서라도 도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흠종은 두려움에 떨며 마지못해 도성에 머무를 뿐이었다.


결국 송은 금나라가 요구하는 모든 굴욕적 조건들, 황금 5백만 냥, 백은 5천만 냥, 비단 1백만 필, 우마 1만 마리 등을 바치기로 하고, 흠종이 금나라 황제의 조카가 될 것 등을 모두 수락했으나, 이듬해에 금나라에 멸망하고 말았다.

 

때는 1127년, 이 사건을 후대의 사가들은 당시의 연호를 따서 '정강의 변'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변경에 도읍했던 북송은 멸망했다. 휘종과 흠종, 3천 명의 종실들은 포로로 잡혀 옛땅으로 유배되었으며, 휘종과 흠종은 그곳에서 쓸쓸한 여생을 마쳤다.


때마침 금에 사신으로 가기 위해 수도를 떠나 있던 휘종의 아홉째 아들 강왕이 금의 추격을 피해 강남으로 이동, 임안(항주)을 수도로 삼고 송의 피난정권을 수립하니, 그가 고종. 이것이 남송의 시작이다. 


이제 중국은 북중국을 완전히 빼앗기고, 회하를 경계로 금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양국 사이에는 수없이 전쟁이 되풀이되었다.

 

화북지방에도 여러 의병장들이 활약하고, 송은 주전파와 강화파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1141년 강화파가 진회가 악비, 한세충등 명장들의 지휘권을 박탈한 후, 이듬해 다시 금과의 화의를 수립, 그 대립을 종결시켰다.

 

이때 송이 금에게 제출한 서약서에는 대대로 신하의 절개를 지킨다는 약조가 담겨져 있었으니, 이전까지의 중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민족의식이 고조되었던 중국인들에게 악비는 영원한 민족의 영웅으로 두터운 사랑을 받았으며, 그를 투옥, 끝내 옥사시켰던 진희는 대표적 매국노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대표적 의병장으로 금군에 타격을 주었던 악비는 중국인들의 중원 복귀의 꿈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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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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