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주의 대 교조주의'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1.12.17 중국사 100장면 - 94. 수정주의 대 교조주의. 중, 소의 이념대립 (1963년)

 

 

 

 

 중국사 100장면 - 94. 수정주의 대 교조주의 

 중, 소의 이념대립 (1963년) 

 


중국공산당은 1921년 공산당의 창립 때부터 소련공산당의 지도를 계속 받았다. 1949년 중국을 장악한 직후에도 모택동은 소련이 이끄는 국제 사회주의를 확고하게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국제사회에서 벌언권을 강화해나가면서 점차 소련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특히 소련과 견해차이를 보이는 것 중 하나가 1950년대 미국에 대한 입장이었다. 중국은 '미제국주의'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주장한 반면 소련은 가능하면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입장이었다. 그외에도 국제 공산주의 조직에 대한 지원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보였다.


1957년 11월 모스크바에서는 12개국이 참가한 공산당 회의가 열렸다. 모택동은 중국 대표단을 이끌고 이 회의에 참석, 미국과의 핵전쟁도 피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발언을 한다.

 

1958년 2월 3일 <인민일조>는 다음과 깉이 말하고 있다. '소련을 포함한 사회주의 진영각국의 지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국제환경은 의연히 자본주의 제국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지본주의 집단들은 우리들을 전복시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소련이 미국과의 대결을 피하고 평화를 원하는 타협적인 자세를 보이게 되는데에 대해 중국은 아직도 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의에 대한 공격의도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점에서 중국은 소련이 사회주의의 순수성을 포기한 수정주의 노선이라고 비판하는 데 비해 소련은 중국이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지않고 사회주의의 원칙에만 충실하고자 하는 교조주의라고 비판한 것이다.

 

서로 간의 대립은 중국으로 하여금 소련에 의존하지않는 국방력 건설, 스스로의 힘에의한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겠다고 선언하도록 했다. 그러한 중국의 독자적 군사력 강화계획은 결실을 맺어 1964년 최초의 원폭실험에 성공했으며, 67년에는 수폭실험에도 성공했다. 


1958년 7월 모택동과 흐루시초프 사이에 중, 소정상회담이 열린다. 이 회담에서 흐루시초프는 중소연합함대를 구성하여 극동의 방위체제를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이것은 소련이 핵전쟁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중국의 핵을 소련의 통제아래 두고자 하는 의도였다. 중국은 이 제안을 거부했고, 소련은 이에 대응, 원자폭탄의 견본과 생산기술을 제공하기로 한 약속을 무효화시켰으며, 소련에서 파견한 기술자들을 철수시켰다. 


1959년에는 티베트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로인해 중국과 인도가 대립하게되자 소련은 인도를 지지하고 나섰다. 당연한 결과로 중국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중국과 인도의 대립은 대규모 전쟁으로 번졌고, 소련은 인도에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한다. 


대외정책 면에서 두 나라는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50년대 60년대 초까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데 소련은 이러한 나라들에 대해 무장투쟁보다는 정치적압력과 협상에 의한 독립을 권했고, 신흥독립국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정치 경제적인 속박을 당하게 하지 않기 위해 경제원조 정책을 위주로 하고 있었다. 소련은 지역적인 분쟁이 확대되어 미국 등이 개입하는 핵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중국혁명과 같은 방법이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민족해방의 모범이 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노선을 비파하면서, 독립을 위해 싸우는 무장세력들을 적극 지원했다.

 

아시아, 아프리카 신흥 독립국들 상당수로부터 지지를 획득하게 된다. 이것은 중국이 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서 양진영의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새로운 제3세력의 중심국가로 역할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중국은 이제 소련을 더 이상 사회주의 종주국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소련은 사회주의 노선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수정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판이 중국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소련을 제국주의 미국이 공모자라고 지칭하기까지 했다.

 

이제 중국은 자본주의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파악했던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만 했다.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이 전쟁의 위혐을 내세우면서 사회주의 국가들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제국주의를 실천함과 동시에, 초강대국 두 나라 사이는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인정해주는 공모자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미국도 제국주의이지만 소련 역시 사회주의적 제국주의라는 것이다. 당시 중국지도자들은 이 두나라를 제1세계로 보고 그보다 국가의 힘이 좀 약한 서유럽과 일본 등을 제2의세계고 파악했다. 중국으로 볼 때  이 제2세계는 각국의 민족주의에 호소하면 미국과의 관계를 약화기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나라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나라들은 제3세계로 파악한다. 제3세계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저개발국으로 끊임없이 제국주의에 의해 군사적인 위협과 아울러 경제적인 착취를 당하는 나라들이다.

 

60년대까지 중국은 미국을 '세계인민의 적'으로 지칭했으며 소련을 미국의 공모자로 불렀다. 따라서 중국의 대외정책은 이 두 나라에 적대하면서 제2세계 일부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노력하는 것 되에 주로 신생독립국드과 비동맹권을 형성하는 데 집중한다.

 

 

 

 

 

 

글이 마음에 드시면 아래 공감버튼 살짝 눌러주세요.

공감과 댓글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전화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