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53. (영락대전)이 완성되다
명을 건국한 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두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그 한가지 방법은 백성들의 경제와 행정제도의 정비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었으며, 다른 또 하나는 그를 도와 나라를 세우고 원나라를 몰아내는 데 공이 많은 측근 신하들을 죽이는 방법이었다.
특히 나라를 다스릴 인재를 구하기 위해 전국에 특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또한 문신을 우대하고 중용하는 정책을 폈는데, 그에 대해 무신들이 불만을 갖게 되자 그는 "세상이 혼란하면 무가 나서고, 세상이 평화로우면 문이 다스려야 한다"고 대꾸했다고 한다.
그가 황제에 머무는 동안 여러차례의 숙청이 있었고, 그때마다 그를 도와 명을 건국하고 원을 밀어내는데 공이 큰 역적의 노장들을 포함하여 수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는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는 그의 아들에게 확고한 지위를 마련해주기 위한 계책이었다. 더 이상 무인들이 황제의 주변에 많이 모여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기로 되어 있던 그의 큰아들이 갑자기 죽게 되자 그는 자신의 황제 자리를 계승할 사람으로 그의 손자를 지칭했다.
그러나 손자는 아직 나라를 이끌어나갈 만큼 성장하지 않아 태조는 주씨 황실의 유지에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불안감이 크면 클수록 숙청은 더욱 가혹하게 행해졌다.
홍무제의 숙청이 하도 잔인하여 제위를 계승하게 되어 있는 그의 손자가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간언을 했다. 그러나 홍무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다음날 손자를 조용히 불러 가시 많은 나무를 맨손으로 잡아보라고 했다. 손자가 가시 돋힌 나무를 집어드는 것을 주저하자 태조는 손자를 향해 말했다.
"가시가 있으면 손을 찌른다. 내가 살아 있을 때 가시들을 모두 없애 너에게 전해주려는 것이다"
이것이 숙청을 위해 무수한 인명을 살상했던 태조 주원장의 내심 이었다.
홍무제는 1398년 7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황제의 자리는 그의 손자에게 계승되었다. 바로 명의 제2대 황제인 건문제다. 그러나 건문제 통치시기 황제의 자리를 위협한 것은 태조 주원장이 염려했던 개국공신들이 아니라 황실 내부에 있었다.
태조에게는 26명이나 되는 많은 아들이 있었다. 그 혈족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중 가장 야심만만한 사람이 태조 홍무제의 넷째 아들이며 나중에 영락제가 되는 주체였다.
태조의 큰아들인 주표가 일찍 죽은 후 제위가 주표의 아들에게 돌아갔으니, 주체는 2대 황제 건문제의 삼촌이 되는 셈이다. 주체는 원래가 야심만만한 사람으로 아버지를 도와 전쟁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우기도 했다.
영락제를 다른 왕과 비교하자면 당나라 건국자 이연의 아들로서 나중에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당태종 이세민, 조선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이었다가 왕자의 난으로 왕의 자리를 빼앗은 태종 이방원과 비슷한 성격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인물로 보인다.
태조 주원장도 넷째 아들인 주체의 능력을 알고 있었으며, 큰아들이 죽자 주체에게 황제의 자리를 잇게 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태조 홍무제는 못내 아쉬워 통곡했다고 한다.
22세에 황제의 자리를 계승한 건문제는 지방의 번황으로 임명된 황족들을 눌러 중앙의 권력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번'이라는 것은 황제가 관장하지 않고 황족이나 혹은 그 지역의 실력자들에게 통치를 위임한 일종의 지방 자치지역이다.
번의 존재한다는 것은 아직 중앙의 황제의 세력이 절대적인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분열된 세력을 통합한 후 중앙권력을 강화하려 할 때 번의 왕은 보통 자기들의 세력 근거지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저항을 하게 된다. 한나라 무제 때의 '오초 7국의 난'이나 청나라 때의 '3번의 난'이 그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건문제가 첫 번째로 제거하려 했던 것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 그러니까 건문제의 막내 삼촌으로 주왕에 본해진 주수였다. 주왕 주수는 체포되어 운남지방에 유배되었다. 이어서 제왕 주부, 대왕 주계가 번왕의 직위에서 쫓겨나 평민이 되었고 상왕 주백은 자살했다.
그러나 야심만만하고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넷째 황자 연왕 주체는 건문제가 결국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건문제는 주체를 가장 두려운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쉽사리 제거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건문제가 연왕 주체의 체포를 명했을 때 주체는 순순히 앉아서 당하지 않았다. 그는 북경에서 먼저 군사를 일으켜 남경으로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제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를 '정난의 변'이라고 한다. 물론 명분상으로는 황제를 보좌하고 있는 간악한 신하들을 처단하여 황제의 권위를 다시 세운다는 것이었다.
황제의 군대와 연왕 주체의 군대는 맞붙어 싸우게 되었고 그 싸움은 4년 여를 끌었다. 군대의 숫자나 여러 가지 면에서 황제의 군대가 유리했으나 이를 효과적으로 통솔하고 지휘할 수 있는 인물이 많지 않았다.
이미 태조 홍무제가 황실의 안전을 위해 개국공신들을 거의 숙청, 처형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우세한 군사력을 가지고 초반에 승리하던 황제의 군대는 유능한 지휘관의 부족 등으로 사기가 떨어지면서 연왕의 군대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무장들을 제거하여 황실의 안전을 도모하려 했던 홍무제는 결국 자기 꼬임에 넘어간 꼴이 된 것이다.
마침내 주체의 군대는 남경의 성곽에 도달했다. 전세가 연왕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수도 남경의 수비대 내부의 불안은 커졌고, 자기의 살 길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연왕 주체와 내통하여 빠져나감에 따라 남경 주비는 더욱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다.
남경의 성문이 연왕과 내통한 내부인에 의해 열리고 군인들이 미구 성안으로 쏟아져들어오고 있을 때 황제 곁에 남아서 황제를 끝까지 지키려는 신하는 거의 없었다.
연왕의 군대가 남경을 함락하여 군대들이 밀려들자 건문제는 궁성에 불을 질렀다. 주체는 건문제를 찾기 위해 궁성의 샅샅이 뒤졌으나 불탄 황후의 시체밖에 찾을 수 없었다. 건문제는 중의 복장으로 변하고 성을 탈출, 잠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남경을 함락하여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홍무제의 넷째 아들 연왕 주체가 바로 성조 영락제이다. 그는 여러 차례 몽고지역에 원정하여 그들의 침략의 근거지를 도려내려 했으며, 안남을 거쳐 수마트라 지역까지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안으로는 문물제도의 정비에 힘썼으며 대대적인 편찬사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사서대전>, <오경대전>, <영략대전> 등이 그의 통치시기에 정리되었다. 특히 <영락대전>은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2천여 명의 학자들이 약 3년간의 작업 끝에 완성시킨 것이다.
이 책은 천문, 지리, 역사, 사상, 정치제도뿐만 아니라 의학이나 연극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중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총정리라고 할 수 있다.
그 권책 수만 하더라도 22937권 10109책 4뎍자 가량에 이른다. 그러나 이 책은 1900년 서양세력이 청나라에 침입했을 때 상당 부분 불타거나 외국에 유출되어버리고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은 겨우 100여 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알쓸신잡 > 중국사 100장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사 100장면 - 58 변방, 바다에서 밀려드는 오랑캐 북로남왜의 화(16세기 중엽~16세기 말) (0) | 2021.05.10 |
---|---|
중국사 100장면 - 56. 황제 위에 올라탄 환관. 토목의 변(1449년) (0) | 2021.04.28 |
중국사 100장면 - 55. 명목적 조공과 힘의 논리. 중국의 월남 정복(1407년) (0) | 2021.04.23 |
중국사 100장면 - 54. 화교들, 동남아시아로 진출 (0) | 2021.04.17 |
중국사 100장면 - 52. 한족, 다시 중국 대륙의 주인으로. 주원장의 명 건국(1368년) (0) | 2021.04.10 |
중국사 100장면 - 51. 징기즈간의 후예에 맞선 한족. 홍건적의 난(1351년) (0) | 2021.04.07 |
중국사 100장면 - 50. 희곡과 소설의 개화. 원대 서민문화의 발달(13~14세기) (0) | 2021.04.02 |
중국사 100장면 - 49. 마르코 폴로의 중국여행.<동방견문록>의 완성(1299년) (0) | 2021.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