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17. 동서교역로의 좁은 문 비단길 개통
비단길을 개통한 장건과 비슷한 인물을 굳이 서양사에서 찾는다면 콜럼버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들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첫 탐험가였으며, 그들이 개척한 새로운 교통로는 동서의 교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물론 장건은 고대, 콜럼버스는 근대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교는 어디까지나 순수 비교일 뿐, 그들이 미친 사회적 파급력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간격만큼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장건은 본래 탐험가로서 서역탐험에 나섰던 것은 아니다. 그는 무제가 파견한 외교사절이었다. 무제는 중국의 오랜 숙원이요 당시의 가장 커다란 현안이었던 북방의 흉노족을 효과적으로 치기 위해 서쪽의 월지국과 군사동맹을 맺고자 했고, 장건이 그 사절단장으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진한대 중국 북방에서 가공할 위력을 떨쳤던 흉노족에 대해서는 불행해도 현재까지 명맥이 이어지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서양 고대의 몰락과정에서 등장하는 훈족도 바로 흉노의 일파라는 설이 있다.
그들은 당시의 최첨단 기술이었던 기마술을 스키타이로부터 도입, 아시아에서 가장 최초로 흥기한 유목민족이 되었다.
진시황도 이들에 대해 뾰족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일부를 북방으로 내몰면서 만리장성의 대역사를 이루었고, 한고조는 이들과의 싸움에서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한나라에서는 이들의 대표인 선우에게 황족의 딸을 시집보내고 온갖 선물로 회유하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전제권력을 확립한 무제 때에 이르러 국가의 명운을 건 흉노와의 대전쟁이 단행되었다. 흉노와의 전쟁은 약 20여년간 끈질기게 되풀이되었다.
한은 위청과 곽거병 등의 뛰어난 명장을 영웅으로 배출시키면서 흉노의 세력을 약화, 이들을 외몽고 지역으로 내쫓는 데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흉노의 위협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되풀이되는 대규모 살상전으로 한나라측의 손실도 대단한 것이었다. 인명피해는 말할 필요도 없고, 재정상의 타격도 매우 심각해서 무제기의 빛과 그림자를 한꺼번에 연출했다.
무제 때는 한이 국력을 가장 크게 떨쳤던 때이기도 하지만, 또한 쇠퇴의 씨앗을 배태한 시기이기도 하다 무제 추기에 관의 창고에는 곡식과 화폐가 넘쳐나서, 곡식이 썩어나가고 돈을 꿴 줄이 썩어 셈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으나, 말기에는 바닥난 재정 타개하기 위해 염철전매법 등 신경제정책이 수립되어야 했다.
어느 날 무제는 흉노의 포로로부터 솔깃한 애기를 들었다. 흉노의 서쪽에 월지라는 나라가 있어 일찍이 흉노에 패한 바 있는데, 그왕은 흉노왕이 자신의 부친의 해골을 술잔으로 사용한다는 애기를 듣고서 단단히 복수를 벼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이들과 연합, 양쪽에서 흉노를 협공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훌륭한 묘안은 없을 것이었다. 이에 사신을 자정하고 나선 이가 바로 장건이었다.
장건은 기원전 139년 100여 명의 일행을 이끌고 월지국을 향해 출발했다. 월지국이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닥칠 것인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당시까지 중국인들은 중국의 서쪽에는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서역이라 하여 막연히 중국의 서쪽 지역 모두를 지칭했는데, 그 서역이란 오늘날로 말하자면, 좁게는 타림분지 주변을, 넓게는 중앙아시아 전역, 나아가서 서아시아까지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인식은 중국의 서쪽에 중국을 외부세계로부터 차단하는 험준한 자연조건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지리적 고립이 중국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세계 문명 발생지를 볼 때 중국만이 유일하게 황하 문명 이래의 그 기본골격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장건일행이 월지를 향해 서쪽으로의 길을 떠났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흉노의 포로생활이었다. 월지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흉노의 땅을 통과해야만 했고, 그들이 국경을 밟는 순간 곧바로 흉노에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장건은 그곳에서 10년이 넘는 억류생활을 해야했다. 그동안 흉노족의 부인을 얻고 자식까지 두었던 그는 사절의 사명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탈출, 대원국을 거쳐 마침내 월지국에 도달했다.
그러나 월지국은 이동을 거듭, 남러시아의 소그디아나 지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이미 비옥한 지애에 안주하고 있었던 그들은 옛 원한을 되살려 흉노를 정벌하는 모험에 나서고자 하지 않았다.
교섭에 실패한 그는 타림분지 남쪽, 즉 천산남로로 귀국했는데, 또 다시 흉노에 억류되었다가 다시 탈출, 마침내 귀향에 성공했다. 기원전 126년, 실로 13년간에 걸친 대단한 집념이었다. 흉노 부인과 종자 감보만이 그를 다르고 있었다.
장건은 체격이 좋고 관대하며 신의가 두터워 흉노 등 외국 사람들에게도 호감을 받았다고 하며, 감보는 본디 유목민족으로 활을 잘 쏘아, 험난한 여행 도중 식량이 떨어졌을 때는사냥으로 생활을 자급하거나 위기를 모면하게 하여 장건의 귀향을 도왔다.
비록 월지와의 동맹에는 실패했지만, 장건의 서역 견문은 무제를 비롯한 당신의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으며,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제 중국인들에게는 월지 외에 대원, 오손, 강거 등 중앙아시아 각국의 사정과 문물이 전해졌다. 인도(신독국)의 존재도 이때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무제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것에는 서역 제국의 신기한 물산도 있었지만, 명마에 대한 이야기였다. 장건은 말하기를 대원국은 천마의 후손으로 일컬어지는 데, 피땀을 흘리며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한혈마의 산지라고 했다.
무제는 명마를 얻기 위해 대원국에도 정벌의 군대를 보냈고, 이광리는 중국사상 최초로 파미르 고원을 넘은 군사가 되었다. 한나라의 위력은 서역에 진동하게 되었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각 국가의 교류가 시작되었으며, 이들을 통해 서아시아, 심지어 로마(대진국P의 문물도 교류되게 되었다.
그 동서 문화의 교통로의 이름이 바로 비단길. 이 길을 통해 서역에 전해진 중국의 대표적인 물산이 비단이었기 때문이다. 포도와 석류, 호도, 낙타, 사자, 공작, 향로, 상아, 산호, 유리 등이 중국에 전래되었고, 중국의 비단, 칠기, 약재 등이 서역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들 교역품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의 교류는 대중적 수요에 기초를 둔 광범한 것은 아니었고, 주로 귀족들의 사치품을 위주로 한 귀족들 상호간의 교류였다.
로마의 귀족들은 중국 비단의 부드러운 감촉과 아름다운 광택에 매료되어 이를 사기 위해서는 어떤 비싼 값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단길을 이야기할 때 후한 대의 반초를 빼놓을 수는 없다. 반초는 궁정관료 반표의 아들로 (한서)의 저자로 유명한 반고의 쌍둥이형제다. 그의 누이동생 반소는 고대중국의 가장 뛰어난 여성지식으로 반고가 죽은 후 (한서)를 완성했다.
반초는 30여년간 서역 경영에 주력, 카스피해 이동의 50여 국을 복속, 비단길을 장악했으며, 감영을 로마 사절로 파견하기도 했다.
비단길을 통한 동서 교역은 7세기 중엽 당나라 때에 가장 번영, 당의 국제적인 문화를 꽃피우게 했다. 동서양의 각종 산물과 함께 각종 종교, 과학기술, 음악, 곡예 등 민간의 기예, 풍습 등도 이 길을 통해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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