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곽남취 (南郭濫吹)

南(남녘 남) 郭(성곽 곽) 濫(함부로 람) 吹(불 취)

무능한 자가 재능이 있는 척하거나, 실력이 없는 자가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

  

한비자(韓非子) 내저설(內儲說) 상편에는 남곽처사(南郭處士)라는 무능한 자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은   (피리 우) 라는 관악기의 연주를 매우 즐겨 들었다. 그는 많은 악사들이 함께 연주하는 것을 특히 좋아하여, 매번 300명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악기를 연주하게 하였다.


우를 전혀 불지 못하는 남곽이라는 한 처사가 선왕을 위하여 우를 불겠다고 간청하였다. 선왕은 흔쾌히 그를 받아들여 합주단의 일원으로 삼고, 많은 상을 하사하였다. 남곽은 다른 합주단원들의 틈에 끼여 열심히 연주하는 시늉을 했다. 


몇 해가 지나, 선왕이 죽고 그의 아들인 민왕(緡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민왕은 아버지인 선왕과는 달리 300명의 합주단이 연주하는 것을 즐겨 듣지 않고 단원 한 사람이 단독으로 연주하는 것을 즐겨 들었다. 난처해진 남곽은 자신의 차례가 돌아 오자 도망치고 말았다.


南郭濫吹(남곽이 우를 함부로 불다) 는 남우충수(濫 充數) 라고도 한다. 이는 무능한 자가 재능이 있는 척하거나, 실력이 없는 자가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이용후생 (利用厚生)

利(이로울 리) 用(쓸 용) 厚(투터울 후) 生(날 생)

모든 물질들의 작용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여 백성들의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하다

  

상서(尙書) 우서(虞書)의 대우모(大禹謨)에는 우(禹)와 순(舜)임금과 익(益) 세 사람의 정치에 관한 대담이 기록되어 있다. 


우는 순임금에게 말하길  임금이시여, 잘 생각하십시오. 덕으로만 옳은 정치를 할 수 있고, 정치는 백성을 보양(保養)하는데 있으니, 물·불·쇠·나무·흙 및 곡식들을 잘 다스리시고, 또 덕을 바로 잡고 쓰임을 이롭게 하며 삶을 두터이 함을 잘 조화시키십시오(正德利用厚生, 惟和) 하고 하였다. 


또한 춘추좌전(春秋左傳) 문공(文公) 7년조에도  수(水) 화(火) 금(金) 목(木) 토(土) 곡(穀)의 여섯가지가 나오는 것을 육부(六府)라 하고, 백성의 덕을 바르게 하는 정덕(正德)과, 백성들이 쓰고 하는데 편리하게 하는 이용(利用)과, 백성들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후생(厚生), 이것을 삼사라 이릅니다(正德利用厚生, 謂之三事) 라는 대목이 보인다.


利用厚生이란 모든 물질들의 작용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여 백성들의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하다 라는 뜻이며, 정치의 핵심을 집약한 말이다. .

  


  

완화자분 (玩火自焚)

玩(가지고 놀 완) 火(불 화) 自(스스로 자) 焚(불사를 분)

무모한 일로 남을 해치려다 결국 자신이 해를 입게 되는것을 말한다.

  

춘추좌전 은공(隱公) 4년조에는 무력의 위험성을 경고한 기록이 있다. 춘추시기, 위(衛)나라 군주인 장공(莊公)의 첩이 아들을 낳자 이름을 주우(州 )라고 하였다. 


주우는 어려서부터 장공의 총애를 받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 무력으로써 해결하려 했다. 장공이 죽자 환공(桓公)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주우는 기원전 719년 환공을 죽이고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주우는 왕위를 찬탈한 후, 송(宋), 진(陳), 채(蔡) 나라 등과 연합하여 정(鄭)나라를 공격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노(魯)나라에 알려지자 노나라의 은공은 중중(衆仲)이라는 대부에게 주주의 장래가 어떠할 것인지를 물었다. 


중중은 대답하길  주우는 무력만을 믿고 잔인한 짓을 하면서도 태연합니다만, 무력에 의지했다간 국민을 잃게 됩니다. 무력이란 불과 같은 것이어서, 단속하지 않으면 장차 자신이 그 불속에서 타게 될 것입니다(夫兵, 猶火也. 弗 , 將自焚也) 라고 하였다.


완화지분 (玩火自焚)이란 무모한 일로 남을 해치려다 결국 자신이 해를 입게 됨 을 비유한 말이다. 

  


  

사불급설 (駟不及舌)

駟(사마 사) 不(아닐 불) 及(미칠 급) 舌(혀 설)

말이 입 밖을 나가면 사두마차도 따라잡지 못한다.

  

논어(論語) 안연(顔淵)편에는 경솔한 말을 경계한 대목이 있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에게 위(衛)나라 대부(大夫)인 극자성(棘子成)이  군자는 바탕만 있으면 되었지 문(文)이 왜 필요합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자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안타깝습니다. 그대의 말씀은 군자의 말씀입니다.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도 혀에 미치지 못합니다(夫子之說君子也, 駟不及舌). 문(文)이 질(質)과 같고 질(質)이 문(文)과 같다면,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이 개나 양의 가죽과 같다는 것입니까? 


송(宋)나라 구양수(歐陽修)의 필설(筆說)에도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한번 입을 떠나면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로도 쫓기 어렵다(一言旣出, 駟馬難追) 라는 대목이 있다.   


사불급설(駟不及舌) 은 사마난추(駟馬難追)라고도 하는데, 이는 말을 신중하게 해야함을 비유한 표현이다. 

  



  

상가지구 (喪家之狗)

喪(죽을 상) 家(집 가) 之(-의 지) 狗(개 구)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는 초라한 사람을 비유.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공자의 초라한 모습을 이야기한 대목이 있다. 춘추시기, 공자(孔子)는 제자들을 데리고 열국(列國)을 주유(周遊)하였다. 


(鄭)나라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과 길이 엇갈려버린 공자는 하는 수 없이 동문(東門)아래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초조해진 공자의 제자들은 모두 나뉘어 이곳저곳을 돌아 다니며 그를 찾았다. 


제자들중에서 자공(子貢)이 가장 열심히 사방으로 스승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러던 중 어떤 정나라 사람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문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이마는 요(堯)임금과 같고, 그 목은 고요(皐陶)와 같으며, 어깨는 자산(子産)과 같았소. 그렇지만 허리 아래로는 우(禹)임금에 세치쯤 미치지 못하였고, 그 지친 모습은 마치 초상집의 개(若喪家之狗)와 같았소. 


제자들을 만난 공자는 자공의 이러한 말을 듣고  용모에 대한 말을 맞다고 하기 어렵지만 초상집 개 같다는 것은 딱 들어맞는 말이다(而似喪家之狗, 然哉然哉) 라고 했다.  


상가지구 (喪家之狗)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는 초라한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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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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