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15. 브루투스, 너마저도!

케사르, 공화파에게 암살(기원전 4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기원전 58년/동부여에서 주몽 탄생

기원전 37년/주몽, 고구려 건국

기원전 18년/온조, 백제 건국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걸출한 영웅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알렉산더가 그렇고 칭기즈칸이 그렇다. 그 영웅 중에 영웅으로 율리우스 케사르를 꼽는 데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마 그의 정복사업과 명성에 곁들여 극적인 그의 죽음 때문이 아닐까생각된다. 


포에니 전쟁이 끝난 후 로마 지배층은 족벌당과 빈민당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전자는 귀족 중심의 지배를, 후자는 군사독재를 목표로 했다. 


족벌당 영수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여 명성을 떨쳤지만, 원로원은 그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폼페이우스는 빈민당 영수 케사르, 부호 출신인 크라수스와 손을 잡고 원로원에 맞섰다. 제1회 삼두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기원전 60년의 일이다. 케사르는 유서 깊은 가문 출신으로 훌륭한 웅변술과 정치력으로 시민들의 인기를 한몸에 얻고 있었다. 


그는 갈리 총독이 되겠다고 자청, 4개 군단을 이끌고 정복의 길을 떠났다. 갈리아 지방은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일대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 원주민인 갈리아인은 용맹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케사르는 이 지방을 평정하기만 하면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훨씬 탄탄해지리라는 야심에 찬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며 싸움에 앞장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병사들의 산망을 얻은 그는 라인 강 너머 게르만 땅까지 공격, 승리를 거두었고, 바다를 건너 브리타니아, 즉 지금의 영국에 까지 쳐들어갔다. 당시로서는 미지의 세계요 야만인들이 사는 미개지인이곳에서 거둔 케사르의 전과는 그 명성을 한층 높여주었다. 


그러던 중 파르티아 원정을 떠났던 크라수스가 그만 패하여 죽고 말았다. 삼두정치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케사르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데 불안을 느끼고 원로원과 다시 결탁, 케사르를 타도하고자 했다. 


음모를 알아차린 케사르는 분노하여 로마로 진격할 결심을 했다. 그가 이그는 군대는 단숨에 루비콘 강에 이르렀다. 이 강은 이탈리아 본국과 속주를 가르는 경계선으로서, 원로원의 승인 없이 이 강을 건너는 것은 곧 반역행위에 해당되었다. 케사르는 망설였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는 이 유명한 말을 남기고 말을 몰아 강물 속으로 들어섰다. 그의 군대는 순식간에 로마에 입성했다. 폼페이우스는 이미 도망친 뒤였다. 케사르의 쿠데타는 대성공이었다. 그는 쉽게 원로원과 시민들의 지지를 획득했다. 


케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뒤쫓아 이집트까지 진격해갔다. 당시 이집트는 로마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폼페이우스는 거기서 자객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케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던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여왕으로 봉했다. 지혜롭고 아름다운 젊은 여왕과 영웅 사이에 사랑이 무르익었고, 케사리온이라는 아들이 태어났다. 


로마로 돌아온 케사르는 권력을 한손에 쥐었다. 원로원은 그를 종신 총통으로 임명했다. 로마는 이제 이름만 공화정일 뿐, 사실상 케사르 한 사람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케사르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었으며, 그 역시 나약한 공화정 보다는 강력한 제정을 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건국  이래 이어져 내려온 전통인 공화정을 무너뜨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에 나가던 케사르는 광장 입구에서 40여명의 공화파에 둘러싸였다. 그들은 일제히 단검을 휘둘렀다. 케사르는 칼에 맞아 비틀거렸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일격을 가했다. 바로 그가 친아들처럼 아끼던 브루투스였다.   


'브루투스, 너마저도!'


비통한 외침을 남기고 케사르는 쓰러졌다.  케사르의 죽음은 공화파와 제정파간의  권력투쟁이 낳은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도 공화정은 지킬 수 없었다. 이미 로마의 공화정은 건국 초의 건강함을 다 잃고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번엔 케사르의 조카이자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친구 안토니우스간에싸움이 벌어졌다. 클레오파트라와 손잡은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자,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란 칭호를 주었다. 


불행한 연인들이었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결의 길을 택했다. 이로써 로마 공화정은 그 막을 내리고 제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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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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