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14. 로마제국을 뒤흔든 노예들
스파르타쿠스의 봉기(기원전 73-7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기원전 108년/한 무제에게 고조선 멸망, 한4군 설치
기원전 69년/박혁거세 탄생
기원전 59년/북부여 건국
기원전 73년, 강대한 로마를 뒤흔든 사건이 일어났다. 노예들의 대규모 무장봉기가 그것이다. 봉기의 지도자는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의 검투사였다.
검투란, 노예 가운데 체격이 좋고 건강한 자들을 골라 무예훈련을 시킨 다음 관깨들이 보는 앞에서 서로 싸우게 하여 그를 즐기는 놀이를 말한다.
검투사는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했으므로 그야말로 일회적인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거대한 원형극장에서 수천 명의 구경꾼이 모인 가운데 검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을 보면서, 모마 시민은 흥겨워하며 박수를 치곤 했다.
이들에게노예는 인간이 아닌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검투는 닭싸움 정도의 오락이나 스포츠로밖엔 생각되지않았다.
트라키아 사람 스파르타쿠스는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왔다. 그는 처음엔 광산에서 일하다가, 카푸아의 바티아에 있는 격투경기 훈련소로 팔려가게 되었다.
그곳의 잔혹한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기원전 73년, 78명의 동료들과 함께 훈련소를 탈출, 베스비오스 산으로 도망을 쳤다. 그리고 그곳을 기지삼아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주인의 가혹한 채찍도, 비인간적 대우도 없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새 보금자리에서 그들은 미래를 위해 싸울 준비를 해나갔다. 때마침 기근이 들어 노예와 파산한 농민들이 속속 대열데 가담해왔다.
이제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봉기군은 단순한 도망노예들이 아니라, 귀족과 노예소유주들이 판치는 로마를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세워보려는 희망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기원전 72년 봉기군은 12만 명으로 늘어났다.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보잘 것 없는 무기로 지중해 최강을 자랑하는 로마의 2개 군단을 격파,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점령한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여기서 전열을 정비하여 각자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로마로 진격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71년, 같이 싸우기로 했던 그리스 인들의 배반으로 봉기군은 로마 군의 포위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가까스로 아드리아 해안 부룬티움으로 퇴각했으나, 크라수스가 이끄는 토벌군의 추격을 받아 아폴리아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노예군의 주력부대가 전멸당했으며, 패주한 5천여명도 귀국하던 폼페이우스에 의해 전멸되고 말았다. 포로로 잡힌 자만 해도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하여 6천여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하게 죽어갔다. 그 십자가 행렬은 무려 수십 리에 달했다고 한다.
로마의 정치는 원로원에 의해 움직여지는 공화제였지만, 실제 생산활동에 담당하고 있었던 것은 수십만의 노예였다. 라티푼디움이라고 불리는 대농장에서 노예들은 감독관의 채찍 아래 포도나 올리브를 재배하고 밤이면 도망칠세라 창고에 갇혀 지냈다.
농장, 광산뿐 아니라 가내노예도 수없이 많았다. 수위, 요리사, 이발사, 심지어는 의사까지도 노예의 역할이었다. 여자 노예들은 한층 더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이들은 낮에는 쉴새없이 일을 하고 밤에는 주인의 성적 희롱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로마 인들은 사람이 사용하는 도구를 세 가지로 분류했다. 수레나 삽처럼 소리를 내지 못하는 도구,소나 말처럼 소리를 내는 도구, 그리고 노예처럼 말하는 도구. 노예가 수레나 가축과 다른 점은 '말할 줄 안다'는 것뿐이었다.
노예의 공급원은 주로 전쟁이었다. 케사르는 갈리아 정복 때 무려 100만의 노예를 얻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노예시장이 있던 델로스 섬에서는 하루에 1만 명 정도의 노예가 매매되었다. 어떤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 이탈리아에는 총인구 450만 중에 150만이 노예였다고 한다.
로마의 노예봉기는 스파르타쿠스가 처음이 아니다. 기원전 138년과기원전 104년 두 차례에 걸쳐 시칠리아 섬에서 노예봉기가 일어났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는 로마 본토에서 일어나 3년동안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하고서 천하무적을 자랑하는 로마 군과 팽팽히 맞서 싸운 일대 무장투쟁이었다.
그의 영웅적인 투쟁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의망과 용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그의 이름이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며 역사에 기록된 것도 그런 까닭에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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