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51. 노예무역은 국력의 보고

-흑인노예무역의 절정기(18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701년/장희빈 처형

1712년/백두산 정계비 건립

1725년/여오, 탕평책 실시

1750년/균역법 실시

  


아프리카 서해안의 기니 만 연안의 지도를 보면 다음과 같은 지명들이 나온다. 호초해안, 황금해안, 곡물해안, 상아해안, 노예해안 등등. 이곳들은 이름 그대로 호초(후추), 황금, 상아, 곡물, 노예들이 배에 실려 어디론가 떠났던 장소들이다. 


선진 유럽국에 의해 일찍부터 유린당한 아프리카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여주는 이름이기도 하다. 흑인노예무역이 맨처음 시작된 것은 1530년경이다. 


어느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아프리카에서 실려간 흑인노예 수는 16세기에 90만, 17세기 275만, 18세기 4백만,19세기 7백만, 총 1,465만인데 항해 도중 여섯 명 가운데 다섯 명 꼴로 죽었으므로 실제 끌려간 총수는 무려 6천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은 좀디 좁은 갑판에 갇혀서 몇 주일 혹은 몇 달씨 걸리는 항해 끝에 신대륙 아메리카로 실려갔다. 쇠사슬에 묶여 누워 있는 노예 한 사람당 허용된 공간은 겨우 길이 180센치미터, 폭 40센치미터였다.


노예무역은 주로 영국, 에스파냐, 포르투갈 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노예상인들은 대부분 국왕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 때의 드레이크 선장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는 에스파냐의 상선을 공격하는 한편 흑인노예를 신대륙에 팔아 영국 왕실을 살찌워주었다.


노예무역은 매우 수지맞는 장사였다. 유럽 인들은 노예무역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했다. '흑인은 농장의 활력이다. 밀짚 없이 벽돌을 만들 수 없듯이 노예 없이는 설탕을 생산할 수 없다'


1764년 브리스틀의 설탕 상인 존 피니가 한 말이다. 노예무역은 '그 어떤 사업보다도 국가적 이익이 큰 사업'이었으며, '국력과 해군력의 무진장한 보고'로 간주되었다. 유럽 인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노예제가 '아프리카 야만인들에게 친절을 베푼 것이며 그들은 노예제 덕분에 훨씬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조차 했다.


노예무역이 가장 번창한 것은 18세기이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에스파냐에게서 노예무역권을 빼앗은 영국은 이 무렵부터 노예무역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리버풀은 노예무역으로 번창한 대표적 도시로서, 1730년에 16척이던 노예무역선이 18세기 말엔 132척으로 늘어나 있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면직물 공업이 크레 발달, 원면 수요가 급증했다. 그런데 그 원면은 거의 대부분 아메리카 남부의 광대한 면화농장에서 지배되는 것이었다. 


면화 재배에 동원된 흑인 노예 수는 1790년에 69만 7천 명, 1861년에는 4백만 명이었다. 19세기 초 영국 의회는 노예제도를  금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그러나 노예무역은 계속되었다. 


감시를 피하느라고 흑인들을 상자 속에 집어넣어 운반하는 등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운반된 흑인노예들은 면화농장, 사탕수수농장, 담배농장, 광산 등지로 팔려나갔다.


당시의 한 광고문을 보자. '5월 6일 화요일 애슐리 페리 항 밴스 아일랜드 호에서 250명 가량의 건강한 니그로를 판매합니다. 곡물해안과 와인드워드에서 막도착한 이들은 마마에 걸리지 않도록 보호도고 있습니다. 찰스 타운의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일절 금지됨은 물로 오가는 배도 없어질병에 전염될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해변가에 유행하고 있던 마마를 피해 배 위에서 니그로를 판다는 광고이다. 흑인노예들은 힘겨운 노동과 노예주의 잔인한 학대 밑에서 쓰러질 때까지 일을 했다. 


그들은 어머니와 아내, 딸들이 백인 소유주에게 겁탈당하는 것을 보며 자랐고, 제대로 가족을 이룰 수도 없었으면 이루었다 해도 뿔뿔이 흩어져 팔려가야  했다. 


글을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었으며 조그마한 반항에도 가혹한 처벌과 죽음이 뒤다랐다. 불구가 되어 거리에 버려진 흑인노예, 그들이 있었기에 유럽인은 편안히 설탕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중상주의 정책에 의한 18세기 유럽의 번영 뒤에는 바로 이 흑인노예들의 참담한 희생이 가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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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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