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53. 파리 시민, 바스티유 감옥 습격

-프랑스 혁명 발발(178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784년/이승훈, 천주교 전도 시작

1786년/서학을 금함

1787년/프랑스 배 내항

  


세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을 든다면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사건은 세계사를 질적으로 변화시켰으며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프랑스 혁명은 파리 시민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789년 7월 14일, '힘에는 힘으로 대항하자!'는 혁명가 카미유 데물랭의 선동에 고무된 파리 시민들은 파리 시내 바스티유 감옥을 향해 몰려갔다. 그들의 목표는 감옥 내에 있는 다량의 화약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은 왕의 절대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 악명은 실로 대단했으며, 왕을 비판한 사람들이 이곳에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다. 파리 시민이 점령했을 때, 감옥에는  7명의 죄수들이 갇혀 있었다. 


한편 바스티유가 점령당하는 순간, 루이 16세는 화려한 베르사유궁에서 사냥에 몰두하고 있었다. 무능하고 매사에 무관심한 그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7월 14일 : 없음'


파리 시민의 봉기는 '앙시앵 레짐'이라고 불리는 낡은  제도에 대한 프랑스 민중의 저항이었다. 낡은 제도란 신분제도를 말한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사람을 세 가지 신분으로 나누었다. 


제1신분은 성직자로서 이들은 총 2,600만 프랑스 인구 중 0.4%에 불과한10만 정도였으나 전국토의 10%를 소유하고 세금을 변제받았다. 


제2신분인 귀족은 10만 내지 25만으로 전국토의 20%를 소유했으며, 세금면제는 물론 고위관리직을 독점했다. 


제3신분인 평민은 시민, 농민, 도시노동자로서, 그중 상인, 수공업자, 변호사, 문필가, 하급관리 들로 이루어진 시민은 생활이 비교적 나은 편이었으나, 농민과 노동자들은 간신히 생존할 정도였는데다가 각종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프랑스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신분제 의회가 존재했는데 이를 삼부회라고 한다. 그러나 삼부회는 1614년 이래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루이 16세는 1789년 삼부회를 소집했다. 왕실의 먼성적인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해 5월 베르사유 궁에서 열린 삼부회에는 1신분 대표 300명, 2신분 대표 291명, 3신분 대표 610명이 모였다.  회의는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했다. 제1,제2신분과  제3신분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에 제3신분은 따로 국민의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제3신분의 강경한 태도에 화가 난 왕은 의사당을 막아 버렸고, 이들은 실내 테니스 코트에 모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절대로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테니스 코트의 맹약'이라 한다. 


격분한 루이 16세는 군대를 부르는 한편, 민중에게 인기 있던 재무상 네케르를 전격 파면시켰다. 왕이 국민의회를 무력으로 탄압하리란 소문이 나돌자 파리 시민은 분개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8월 26일 국민의회는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미국 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이 문서는 국민의 자유와 평 등에 대한 권리를 천명한 것으로서 전문 17조로 되어 있으며, 진보적 군인 라파예트가 기초했다고 알려져 있다. 


10월, 파리는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해는 지독한  흉년이었다. 한데 그때 베르사유 궁에서 대연회가 열리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게다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말했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민중은 분노로 들끓었다. 


한 젊은 여성이 병영 안으로 뛰어들어가 북을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순식간에모여들었다. 


'빵을 달라! 빵을 달라!'


외침과 함께 사람들은 행진하기 시작했다. 끼니 걱정에 애를 태우던 여성들이 맨 앞장을 섰다. 목적지는 베르사유 궁이었다. 


루이 16세는 당황한 나머지 여태껏 미루던 '인권선언'의 재가를 그 자리에서 해치웠다. 성난 민중들은 왕에게 파리로 갈 것을 요구했다.  왕은 할 수 없이 왕비와 아들을 데리고 허기진 배를 움켜쥔 여성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파리로 와야 했다. 


1791년 6월, 루이 16세는 왕비와 함께 왕비의 친정 오스트리아로 몰래 도망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바렌에서 붙잡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1793년 1월 21일 민중의 적으로서 단두대에 올려져 처형되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역시 그해 10월 16일,38살의 나이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혁명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프로이센, 영국 등 유럽 각국이 프랑스 동맹을 결성, 프랑스로 쳐들어왔다. 이들은 자기나라로 혁명의 불길이 파급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프랑스는 의용군을 조직, 이들을 막아냈다. 젊은이들은 혁명을 지키려는 뜨거운 의지로 속속 자원을 했다. 그중 마르세유에서 온 의용군이 불렀던 진군가 '라 마르세예즈'는 혁명의 놀로 민중들에게 널리 불리어졌다. 


지금의 프랑스 국가가 바로 그것이다. 잠깐 그 노랫말을 보기로 하자. 


나가자! 조국의 아들딸이여


영광의 날이 왔도다.


독재에 항거하는 우리의 피묻은 깃발은 날린다. 


피묻은 깃발은 날린다. 


보라! 저기 압제자 야비한 무리들의 칼


우리의 형제자매와 우리의 처자를 죽인다. 


무기를 들어라!


대오를 지어라!


나가자! 나가자! 우리 함께


압제자의 피로 옷소매를 적시자!


프랑스 혁명의 주인공은 '상퀼로트' 즉, 시민, 농민, 노동자  모두를 포함한 '민중'이었다. 상퀼로트란 퀼로트를 입지 않은 사람이란 뜻인데, 당시 민중들이 통바지를 입은 반면 귀족은 반바지인 퀼로트를 입고 긴 양말을 신은 데서 나온 말이다. 


그렇지만 혁명으로 부상한 세력은 농민이나 노동자가 아니라 시민, 즉 부르주아지였다. 농민과 노동자가 사회의 중심세력이 되려면 아직도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을 시민혁명, 부르주아 혁명이라 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절대왕정과 봉건잔재는 스러지고 근대 시민사회가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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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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