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56. 불태워진 아편 2만 상자
-중국, 아편전쟁 발발(184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839년/기해박해로 프랑스 신부 등 처형됨
1840년/풍양 조씨의 세도정치 시작
1845년/영국 군함, 전라도 해안 측량
지리상의 발견은 유럽 인에게 신비와 꿈의 세계 동방을 알려주었다. 유럽 인들은 앞을 다투어 동방진출을 꾀했다. 향료, 금, 은, 비단, 차 등 각종 특산물이 유럽 시장에서 비싼 값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런데 일찍이 산업혁명을 완성한 영국은 동방을 단순한 중개무역지가 아니라 원료공급 및 자국 상품을 수출하는 시장으로 삼고자 했다. 아편전쟁은 그 같은 영국의 야심이 불러일으킨 근세 동서양간 최초의 전쟁이다.
전쟁의 발단은 영국의 아편밀수였다. 다시 영국에서는 차 마시는 습관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차와 비단은 거의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하는 실정이었으므로 영국의 대중국 무역은 언제나 수입 초과를 기록하고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막대한 양의 은을 중국에 결재해주어야 했다.
한편 청왕조가 다스리고 있던 중국은 영국이 바라는대로 호락호락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데다가 철저한 중화사상에 의거, 외국을 오랑캐로 여기며 조공국 정도로 대접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영국은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식민지 인도에서 나는 아편을 중국으로 밀수출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상품을 인도로, 인도의 아편을 중국으로, 중국의 차와비단을 영국으로 수송하는 이른바 삼각무역을 행한 것이다.
그 결과 중국은 하루아침에 수입초과국이 되고 다량의 은이 국외로 흘러나가 극심한 재정난을 겪게 되었다. 게다가 아편 중독자가 급증하여 국민건강을 좀먹어들어갔다.
1839년 중국 정부는 임칙서를 황제의 특명을 받은 흠차대신으로 임명, 군사, 행정상의 전권을 주어 아편밀수의 본거지인 광동으로 파견했다. 호광총독이었던 임칙서는 매우 단호하고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3월 10일 광동에 도착하자마자 다음과 같은 포고령을 내렸다.
'첫째, 현재 갖고 있는 아편을 모두 제출할 것. 둘째, 이후에 아편을 밀수하다다 발각되면 아편은 관에서 몰수하고 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
곧이어 3월 19일부터는 외국상인들을 한 발자국도 광동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고 군사를 동원, 상관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는 상인들이 임칙서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아편 실은 배를 멀리 항구 밖으로 도피시켰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
며칠 동안 감금당하다시피한 영국상인들은 아편 1,037상자를 내놓았다. 그러나 임칙선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광동에 들어온 배가 20여 척, 한 척 당 아편 1천 상자를 실을 수 있으므로 총 2만 상자 가량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상무감독 엘리엇은 마카오에서 황급히 돌아와 갖고 있는 아편을 모조리 내놓도록 했다. 그리하여 도합 2만 283상자의 아편이 임칙서 앞에 쌓이게 되었다.
꼬박 두 달이 걸려 회수된 아편을 임칙서는 바닷물과 생석회로 처리, 모조리 마다로 흘려보내버렸다. 엘리엇은 영국상인들에게 마카오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이때 전쟁발발의 기폭제가 된 '임유회 사건'이 터졌다. 임유회는 홍콩 근처 첨사촌의 주민인데, 영국 수병들이 이 마을에서 술을 사려다 사지 못하자 주민들에게 폭행을 가해 그만 임유회가 사망하고 만 것이다. 7월 7일의 일이었다.
임칙서는 범인을 넘겨달라고 요청했지만, 엘리엇은 아직 체포하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화가 난 임칙서는 마카오의 영국인들을 모두 추방, 엘리엇의 가족을 포함한 57가구의 가족들이 바다를 표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11월 3일 엘리엇은 군함 수척을 이끌고 항구에 진입, 양국간에전투가 벌어져 중국배 3척이 침몰당했다. 그러자 이듬해인 1840년 1월 5일, 황제는 영국과의 통상을 정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월등한 화력을 가진 영국이 시종 우세했다. 군함 20척, 대포 668문, 무장기선 14척, 포 56문, 수송선 30척, 병원선 9척, 보병 만여 명, 포병, 기타 측량선을 거느린 영국함대는 광동, 하문, 영파를 공격하고 양자강으로 진출, 상해 진강을 함락한 다음 남경으로 쳐들어왔다.
남경은 중국경제의 심장부일뿐더러 이곳을 빼앗기면 중국은 남북간 교통이 끊겨 반신불수가 되는 꼴이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청조는 굴복을 하고 강화를 청했다. 남경을 눈앞에 둔 양자강 상의 콘월리스 호에서 1842년 8월 29일 조약이 맺어졌다. 이를 남경조약이라 한다.
그 주요 내용은 '중국은 영국에게 군사배상금 및 아편 배상금조로 2,100만원을 지불할 것, 홍콩을 영구히 영국에 할양할 것, 중국은 광동, 복주, 하문, 영파, 상해의 5개 항을 열고, 수출입품에 대한 관세는 양국 협의에 따라 결정할 것'등이었다.
영국은 5개 항을 개방시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데다 홍콩과 관세협정권까지 얻어 막대한 이득을 보게 되었다. 중국으로선 정작 문제가 된 아편에 대해서 책임을 묻기는커녕 거꾸로 배상금을 물어주고 치외법권을 인정, 향후 밀수를 해도 어떤 제재조치도 취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남경조약은 일방적으로 영국측에 유리하게 맺어진 조약이었다. 중국이 잠자는 호랑이가 아니라 허울만 좋은 호랑이임을 알아차린 미국과 프랑스는 호혜평등 원칙을 내세워 조약 체결을 요구해왔다.
그리하여 1842년 각각 망하조약, 황포조약이 맺어졌으며 이후 중국은 서구 열강에게 이리저리 잠식당하는 반식민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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