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50. 유혈 없이 성공한 혁명
-영국, 명예혁명 발발(168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689년/남인 득세, 김만중, '구운몽' 지음
1696년/안용복, 독도에서 일인을 쫓아냄
1699년/괴질로 25만여명 사망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영국은 안팎으로 위기에 처했다. 안으로는 의회파가 장로파, 독립파, 수평파로 갈려 그 골이 깊어만 갔고, 밖으로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가 반란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왕을 처형한 나라라 해서 유러의 군주들은 영국을 두려움과 적의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국왕의 처형은 분명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독립파의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은 탁월한 정치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반란을 진압하여 스코틀랜드 장로파와 손잡고 왕정복고를 꾀하던 찰스 1세의 아들을 프랑스로 쫓아버렸다.
한편 항해조례를 발표, 네덜란드와 해상권을 두고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1654년 크롬웰은 호국경 자리에 올랐다. 그의 지지기반은 군대였다. 그러나 크롬웰은 1658년 사망하고 그로부터 꼭 2년 만인 1660년 5월 29일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런던에 입성했다.
런던 시민은 환호하며 그를 맞아들였다. 거리는 꽃으로 수놓아지고 종소리가 울려퍼졌으며 깃발이 휘날렸다. 창문과 발코니마다 사람들과 트럼펫 소리가 가득 차고, 수많은 군중이 길을 메웠다. 찰스 1세가 처형당한 지 11년 만에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찰스 2세에게 바란 것은 입헌군주제였다. 그러나 그는 망명지 프랑스에서 루이 14세를 한껏 동경하며 지낸 인물이었다. 그의 꿈은 루이 14세 같은 절대군주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찰스 2세는 돌아오자마자 부왕의 처형에 서명한 판사들 중 살아 있던 13명을 처형시키고 크롬웰의 시체를 파내어 그 목을 잘라버렸다.
그런가 하면 몰수되었던 왕당파의 토지를 무상으로 원소유주에게 돌려주고, 카톨릭을 보호하는 정책을 폈다. 왕당파가 왕의 비호 아래 다시 고개를 쳐들어 의회를점령했다. 사람들은 이 의회를 '기사의회'라고 비꼬았다.
1670년 찰스 2세는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었다. 자신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대가로 20만 파운드를 받는 외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군사원조를 받으며, 프랑스를 도와 전쟁에 참여한다는 조건이었다.
그의 친불정책은 국내 자본가들의 이해와 상충되는 것이었으며, 국민감정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카톨릭 세력만이 그를 환영했다.
불안을 느낀 의회는 심사율, 인신보호율을 제정했다. 심사율은 비국교도를 공직에서 추방하는 내용이고, 인신보호율은 아무 이유 없이 인민을 체포, 구금하지 못하며,구금된 자는 20일 이내에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법률이다.
1679년 이번엔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의회와 왕의 대립이 벌어졌다. 찰스 2세는 아들이 없어 그 동생 제임스가 왕위를 잇도록 했는데, 제임스는형보다 더한 전제주의자인데다 카톨릭 교도였기 때문에 일부 의원이 반발, 왕위계승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찰스 2세는 세 번이나 의회를 해산한 끝에 제임스 배척안을 부결시켰다. 배척파들은 망명을 떠났다. 철학자 존 로크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제임스 배척파는 청교도가 주축이었고, 반대파는 지주, 귀족, 성직자들이 중심이었다. 양파는 각각 전자는 휘그 당, 후자는 토리 당이라 불렸다. 이것이 영국 정당의 기원이다.
1688년 5월 제임스 2세의 두 번째 왕비 마리가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바로 명예혁명의 발단이다. 첫째 왕비의 소생인 메리와 앤은 신교도로 어려서부터 신교 교육을 받은 터였지만 새 왕비 마리는 카톨릭이었으므로 의회는 태어난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휘그 당과 토리 당은 손을 잡고 제임스 2세를 몰아내기로 했다. 의회가 후계자로 지명한 인물은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오린지 공 윌리엄이었다.
두 사람은 군대를 이끌고 런던에 입성했다. 딸과 사위에게 쫓긴 제임스 2세는 12월 왕비와 아기를 데리고 프랑스로 망명하고 말았다.
의회는 메리와 윌리엄을 공동 즉위시키고 유명한 '권리선언'을 승인케 했다. '권리선언'의 주요 내용은, 모든 법률의 제정 또는 폐지는 의회를 거쳐야 하며, 의회는 언론의 자유를 갖는다는 것으로 와권을 제한하고 의회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영국에선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입헌군주제가 시작되었다. 영국인들은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성공한 명예로운 혁명이란 뜻에서 이 사건을 명예혁명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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