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47. 짐이 곧 국가이다. 

-프랑스, 루이 14세 즉위(164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645년/소현세자, 청에서 과학, 카톨릭 교 관련 서양서적 수입

1653년/ 하멜, 제주도 표착

  


1661년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확대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유명한 건축가, 조각가, 화가, 정원사가 총동원된 대공사가 20여  년이나 계속되었다. 이윽고 완성된 궁전의 웅장한 규모와 화려함은 유럽 어느 나라의 궁전도 따를 숭 없는 것이었다. 


1682년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으로 거처를 옮기고, 귀족 제후들도 이곳에 와 살면서 자신을 보좌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천 명이 넘는 고위성직자들, 그 시종까지 합하여 도합 5천 명 이상이 베르사유 궁전에 모여들었다. 


회의, 미사, 오찬, 산보와 사냥, 다시 회의, 야회, 만찬 취침-이것이 왕 이하 귀족들의 하루 일과였다. 취침은 보통 새벽 한시였다. 귀족들은 왕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아첨을 다 하였다. 왕에게 셔츠를 건네준다든지 촛불을 건네주는 일은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되었다. 


사실 이는 루이 14세의 교묘한 왕권 강화책이기도 했다. 그는 칼로 귀족세력을 억누른 것이 아니라, 귀족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사치와 낭비에 젖도록 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 


그는 일부러 복잡한 의식을 만들어서 가능한 한 많은 숫자의 귀족이 자신을 위해 봉사하도록 했고, 쉴새없이 연회, 무도회, 축제, 연극공연 따위를 벌이게 했다. 귀족들은 점점 가난해져갔고 그럴수록 더욱 비굴해 졌다. 


베르사유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 귀족에 대해 왕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사람 모르네'

'난 그런 사람 본 적 없네.'


귀족뿐 아니라 후원자가 필요한 예술가들도 베르사유로  몰려들었다. 루이 14세는 이들을 보호하는 한편, 학술기관을 설립하여 문학, 과학, 조각, 건축, 음악, 회화를 연구케 했다. 


라신, 코르네이유, 몰리에르 등 르네상스 3대 희곡작가가 여기서 배출되고, 바로크 양식, 로코코 양식이라는 새로운 예술사조가 생겨났다. 베르사유는 일약 유럽 최고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으며, 프랑스 어는 유럽 공통의 사교어였다.


베르사유는 루이 14세의 소우주였다. 그는 이곳에서 절대적인 왕권을 행사하며 '태양왕'이라 자처했다. 루이 14세는 1643년 5살도 채 못된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재상 마자랭의 섭정을 받던 그는 1661년 마자랭이 죽자 친정을 선언했다. 


루이 14세는 콜베르를 재상으로 임명,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식민지 확장에 주력하는 이른바 중상주의 정책을 폈으며, 에스파냐의 왕위를 둘러싸고 전쟁을 일으켜 자신의 손자를 에스파냐 왕위에 앉혔다. 


한편 신교도를 억압하여 많은 신교도가 국외로 빠져나갔다. 때문에 상공업이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그의 통치기간 중 프랑스는 유럽 제일의 국가로  부상했다. 그는 절대군주의 대명사였고, 화려, 사치, 권력, 명예의 상징이었다.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그의 명제는 국왕의 절대적 권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찬란함은 일반민중의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왕과 귀족들이 베르사유에서 만찬과 연회에 젖어 있는 동안 민중들은 굶주리다 죽어갔다. 당시의 한 기록을 보자. 


보베 지방에 코퀴라는 이름을 가진 한 가족이 있었다. 직조공인장 코퀴는 방직공으로서 그의 일을 돕는 아내와 세 딸-막내는 9살-을 두었다. 다섯 식구가 주당 7파운드의 빵을 소비하는데, 빵값이 파운드당 반 솔Sol일 때는 특식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흉년이 들면서 빵값이 급등했다. 1693년 흉년에다 일자리도 없었다. 이 두 가지 위기는 보통 겹치게 마련이다. 빵값은 처음엔 파운드당 1솔, 다음엔 2솔, 그 다음엔 3솔 이상으로 올랐다. 약간의 저축을 완전히 바닥낸 그들은 갖고 있던 물건을 저당잡혔다. 


그 다음엔 건강에 해로운 음식과 곰팡이 슨 곡류, 동물의 창자, 쐐기풀을 요리해 먹었다. 영양실조와 조악한 식품으로 인한 질병으로 그들은 쓰러져갔다. 


1693년 12월 그들은 구빈원에 등록되었다. 1694년 3월 막내딸이 사망하고 이어서 맏딸과 장 코퀴가 사망했다. 이들의 죽음은 빵값때문이었다. 


농민들은 수확의 상당분을 영주에게 바치고, 십일조를 교회에, 세금을 와의 관리에게 각각 바쳐야 했다. 여성들은 아이가 생기는 대로 낳았지만 농가는 결코 대가족이 아니었다. 


사산과 유아 사망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사산이나 유아 사망은 너무  다반사여서 '천후나 폭풍우, 말의 죽음보다도 덜 중요'하게 여겨졌다고 당시의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 


평균수명은 25살 정도, 100명의 어린이 중  4분의 1이 1살 전에 죽고 또 4분의 1이 20살 전에 죽었다. 마을 주민 100명 가운데 10내지 15명이 흑사병, 외국군대의 약탈, 흉작 등으로 죽어갔다. 


이것이 루이 태양왕 시대 프랑스 민중들의 삶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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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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