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57. 지행합일을 최고선으로 

 양명학의 성립(15세기 말~16세기 초) 

 

 

남송대 이후 원나라를 거쳐 명대에 이르는 동안 중국사상의 핵심은 주자가 완성시킨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거의 완벽한 사상적 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명대 초기만 하더라도 주자학(성리학)의 큰 흐름 밖에서 새로운 사상의 흐름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아울러 후세 사람들은 주자의 생각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게 되어 사상의 새로운 변화를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한치의 빈틈이 없을 것 같은 성리학에 반대하여 새로운 사상을 들고나온 사람이 있으니, 그가 곧 양명학을 성립시킨 왕양명이다.

 

1472년 절강성에서 태어난 왕양명은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가게 된 아버지를 따라 10세 때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5세 때 세도를 부리던 환관 유근에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했으며, 유배나 다름없는 변방의 관직에 머물기도 했다.

 

머무를 집초차 없어 스스로 집을 지어야 했고, 수행하는 시중이 병들어 도리어 그를 간호해야 하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어려운 조건에서 과거 옛 성현들의 도(진리)가 무엇이었을까를 깊이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는 마침내 도라는 것은 여러 사물을 통해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음을 깨우치게 된다.


자기를 내쫓았던 환관 유근이 살해되면서 왕양명은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정상적인 관료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가 살전 시기(1472 ~ 1528)는 문화적으로 명대의 융성기이면서도 반란이나 민란이 자주 일어나던 시기로서, 그는 사상으로뿐만 아니라 군사 전략가, 정치가로서도 능력을 발휘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는 광서성의 반란군을 토벌하고 돌아노는 길에 폐결핵이 재발하여 60세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왕양명은 주자학(성리학)을 비판하고 그의 독창적인 학문인 양명학을 만들었는데, 양명학과 주자학은 어떻게 다를까?

 

우선 주자의 성즉리설에 의하면 이라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이인동시에 외적인 여러 사물의 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양명의 사상은 이것과 달리 이른바 심즉리를 주장하여 마음을 바로잡아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덕성을 존중하고 학문에 의존한다고 했는데, 양명의 생각에는 덕성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학문에 의존할 수 있겠는게 하는 것이다.

 

또한 성리학에서는 성인의 경지는 배워서 도달할 수 있다고 한 데 반해, 양명은 성인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컨대 양명은 마음을 강조한 것이다.

 

예를 들어 효라고 하는 것은 효에 관한 덕목을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를 공경한 자연스러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즉, 효심과 효행은 하나라는 것이다. 이런 경향으로 해서 양명학은 '지행합일' 즉,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라는 주장을 펴게 된다.


성리학에 대항한 양명학이 나오게 되는 것은 송대 사회와 명대 사회가 다른 데에도 이유가 있다. 즉, 송나라 시기는 사대부 중심의 신불질서가 확고한 농업사회였다.

 

따라서 성리학에 의하면 사람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의 직분이 있다는 것이다. 지주와 소작인(전호) 관계는 하늘의 이치에 따라 결정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명대는 상품생산이 활발해지고 화폐경제가 성립했으며 소농민들의 농업경영이 더욱 활발했던 시기였다. 송대 이래의 신불질서가 무너져가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사상도 그러한 사회의 변화에 맞추어 새로이 정리될 필요가 있었다.

 

양명학의 탄생은 그런 사회 변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하여 양명은 "마음으로 구해 옳지 않을 때에는 공자의 말이라도 옳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백성들에 대한 생각에도 두사상의 차이가 있다. 사서 중 <대학>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신민,..."이 나온다. 여기서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구절은 원래 "백성을 친하게 한다"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주희는 이 '친'자를 '신'자로 보며, 왕양명은 원래대로 본다. 이것은 신분질서를 옹호하는 입장인 성리학은 백성을 새롭게 한다고 하여 백성을 교화의 대상, 즉 지배층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양명학에서는 백성을 친하게 한다고 해석하여 단순히 지배층의 교화의 대상이 아니고 함께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왕양명을 이어서 양명학을 계승 발전시킨 사람이 이탁오(1527~1602)였다. 복건성 사람으로 그의 집안이 이슬람 교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족보가 최근에 발견되기도 했다.

 

이탁오 스스로는 나중에 머리를 깎고 마치 승려처럼 행동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세상 사람들의 도덕과 일반적인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괴상한 행동으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결국 70이 넘는 나이에 체포되어 옥에 갇쳐 있다가 옥중에서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쳤다.


이탁오는 왕양명이 마음을 중시한 것을 더욱 강조하여 기존의 인습이나 도덕, 지식 등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 지극히 순수한 마을을 '동심'이라 하고, 이 동심 앞에서는 공자, 맹자도 유교경전도 절대적 권위를 가질 수는 없다고 했다.

 

그의 유교에 대한 이러한 거친 비판이 그의 적들을 많이 만들어냈고 결국 체포되기에 이른 것이다. 왕양명과 이탁오 등의 사상적 활동으로 인해 성리학은 핵심적인 사상의 위치로부터 서서히 밀려나게 되었고 명나라에서는 양명학이 융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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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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