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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7.04 고사성어 - 합포주환, 행재락화, 매독환주, 부형청죄, 양상군자




합포주환 (合浦珠還)

合(합할 합) 浦(개 포) 珠(구슬 주) 還(돌아올 환)

잃었던 것을 찾거나 떠난 것이 돌아옴을 비유한 말

  

후한서(後漢書) 맹상전(孟嘗傳)의 이야기다. 중국 광서(廣西)지방의 합포(合浦)현은 합포주(合浦珠)라는 진주로 유명한 곳이었다. 


한(漢)나라 때, 합포군의 백성들은 모두 진주조개를 채취하여 생활을 하였으나, 탐관오리들은 개인적으로 지나치게 많은 진주를 캐냈다. 이 바람에, 진주 조개가 자취를 감추고, 상인들의 내왕도 끊겼다. 


백성들의 생활이 날로 궁핍해지고 굶어죽는 사람까지 생기게 되자, 사람들은  진주 조개들이 합포에서 살기 싫어 모두 월남땅으로 달아났네. 라고 한탄하였다.


동한(東漢)의 순제(順帝)가 즉위하자, 곧 맹상을 합포의 태수로 파견하였다. 맹상은 먼저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불법행위를 엄단하여 진주 조개의 생산과 보호를 적극 지원하였다.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아, 합포 바다에는 다시 진주 조개가 나타나고 생산량도 증가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모두  떠났던 진주가 다시 돌아 왔네(去珠復還). 라고 말했다.


합포주환(合浦珠還) 이란 잃었던 것을 찾거나 떠난 것이 돌아옴을 비유한 말이다. 

  




행재락화 (幸災樂禍)

幸(바랄 행) 災(재앙 재) 樂(즐길 락) 禍(재화 화)

의 어려움을 보고 기쁨을 느낌을 뜻한다.

  

좌전(左傳) 희공(僖公) 14년조의 이야기다. 춘추시기, 진(晋)나라에 내란이 발생하자 공자 이오(夷吾)는 진(秦)나라로 도망하였다. 


이오는 귀국하기 전에 다섯 성을 진(秦)나라에 감사의 대가로 주기로 하였으나, 진(晋)의 군주, 즉 혜공(惠公)에 즉위하자 생각을 바꾸었다. 


기원전 647년, 진(晋)나라에 가뭄이 들었다. 진혜왕은 지난 날의 일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대부 백리해(百里奚)의 권유로 진(晋)나라에 양식을 보내 주었다. 


이듬해, 진(秦)나라는 기근이 들자 진(晋)나라에서 곡식을 사오려 했으나, 진혜공은 곡식을 팔지 않았다. 대부 경정은 진혜공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은혜를 잊는다면, 이는 무친(無親)입니다. 또한 남의 어려움을 즐기는 것은 불인(不仁)이고, 물건을 남에게 주지 않는 것은 불상(不祥)이며, 이 일로 이웃 나라에게 죄를 짓는 것은 불의(不義)입니다.  진혜공은 이를 틈타 진(秦)나라를 기습하였다가 포로가 되고 말았다.


행재락화(幸災樂禍) 란 남의 어려움을 보고 기쁨을 느낌을 뜻하는 말이다.

  




매독환주(還珠)

買(살 매) (궤 독) 還(돌아올 환) 珠(구슬 주)

본연의 일은 잊고 지엽적인 일만을 추구함 을 비유한 말

  

한비자(韓非子) 외저설좌상(外儲說左上)편의 이야기다. 춘추시기, 어떤 초(楚)나라 사람이 진주(珍珠)를 얻게 되었다. 


그는 진주를 높은 값에 팔기 위해, 향내나는 목란(木蘭)으로 작은 상자를 만들고, 다시 계초(桂椒) 등으로 향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그런 뒤 진주를 상자 안에 넣고, 다시 여러 가지 보석으로 상자의 겉을 

장식했다.


초나라 사람이 진주 상자를 들고 시장에 나타나자, 정(鄭)나라 사람 한 명이 다가왔다. 그는 진주 상자에 마음이 끌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진주상자를 샀다. 


그는 진주 상자를 반나절 동안이나 살펴보고 비로소 상자을 열었다. 초나라 사람은 이 정나라 사람이 진주를 매우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정나라 사람은 진주를 초나라 사람에게 돌려주고는 빈 상자만을 들고 흐뭇한 표정으로 떠나버렸다. 초나라 사람은 상자 파는 솜씨는 훌륭했지만, 진주 파는데는 실패하였던 것이다.


매독환주(買還珠) 란 본연의 일은 잊고 지엽적인 일만을 추구함을 비유한 말이다.

  




부형청죄 (負荊請罪)

負(질 부) 荊(가시나무 형) 請(청할 청) 罪(허물 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처벌을 자청하다.

  

사기(史記) 염파인상여(廉頗藺相如)열전의 이야기다. 전국(戰國)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수하에는 인상여와 염파라는 두 인물이 있었다. 


이들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기원전 279년, 진나라 소왕(昭王)이 혜문왕을 면지( 池)의 연회석상에서 만났을 때, 인상여는 혜문왕의 기선을 꺾으려던 진나라 왕의 계책을 무산시켰다. 이에 앞서 인상여는 진나라로부터 화씨벽을 되찾아온 바 있는터라 명성이 염파를 능가하였다.


장군인 염파는 이러한 인상여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염파를 피하는 까닭을 묻는 부하들에게 인상여는  지금 진나라가 우리 나라를 무시하지 못하는 것은 나와 염파장군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위급을 뒤로하고 사사로운 원한만을 따진다면, 이는 진나라가 바라는 일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염파는 이 말을 전해듣고, 웃옷을 벗은 채 가시나무를 짊어지고 인상여의 집 문앞에 와서 크게 사죄하였다.


부형청죄(負荊請罪) 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처벌을 자청함을 뜻한다.

  




양상군자 (梁上君子)

梁(들보 량{양}) 上(위 상) 君(임금 군) 子(아들 자)

좀도둑 을 비유한 말

  

후한서(後漢書) 진식전(陳寔傳)의 이야기다. 동한(東漢) 시기, 태구현에 진식이라는 현령(縣令)이 있었다. 그는 성품이 정직하고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흉년이 들어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웠던 어느 해, 진식의 집에 도둑이 들어 대들보에 숨었다. 진식은 이를 모르는 척하며 아이들을 불러 모아놓고 말했다. 


나쁜 사람들도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평소에 배우지 아니하고, 자신을 엄하게 다스리지 아니하여 차츰 나쁜 성품이 자라게 된 것이다. 지금은 대들보 위에 올라가 계신 군자가 바로 그러하니라.


이 말을 듣고 있던 도둑은 얼른 대들보에서 내려와 진식에게 사죄하였다. 진식은 그에게  모습을 보아하

니 악인은 아닌 것 같구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이런 짓을 했겠느냐. 했다. 진식은 그에게 비단 두 필을 주며, 그것을 본전으로 하여 장사를 하라고 하였다.


양상군자(梁上君子) 란 곧 좀도둑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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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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