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27. 눈밭에서 맨발로 애원한 황제

-카노사의 굴욕(107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993년/거란 침입, 서희의 담판으로 거란 물리침

1019년/강감찬, 귀주에서 거란의 10만 군사 격파

  

중세 사회의 신분서열을 묘사한 책을 보면, 사회신분은 총 24개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 두 번째는 교황, 그 다음은 수도원장 이하 사제와 카톨릭 관계자들이 차지하고, 황제는 일곱 번째, 국왕은 여덟 번째 영주는 열번째에 자리하고 있다. 제일 끝에 있는것은 유대인이다.


중세 유럽에서 카톨릭의 권위와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카톨릭 교회는 국왕 및 황제와 연합 또는 상호견제하면서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그런데 교회가 황제보다도 우월한 위치에서 막강한 권위를 행사하게 된 계기를 이룬 사건이 1077년에 일어났다. 


당시 카톨릭은 성직자들의 극심한 부정부패와 타락으로 교황 및 성직자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새로 교황에 즉위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의 결혼, 성직 매매를 일절 금지하고, 그때까지 국왕 및 제후가 갖고 있던 성직임명권을 교황이 갖겠다고 공포했다. 


성직자를 세 속의 왕이나 제후들이 임명하기 때문에 교회가 타락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독일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는 이에 격렬히반발했다. 성직임명권을 넘겨준다는 것은 카톨릭 사회에 대한 지배권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카톨릭 사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교황과 황제의 일대 결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1076년 1월 하인리히 4세는 보름스에서 제국국회를 소집,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이번엔 분노한 교황이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말았다. 파문이란 카톨릭 세계로부터의 완전 추방을 뜻하는 것으로 매우 치명적인 조치였다. 카톨릭 교도는 더 이상 황제를 만나선 안되었으며,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제후 역시 황제와 똑같이 불경한 자로 간주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던 독일의  제후와 성직자들은 황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파문이 취소되지 않으면 1088년 2월 교황이 주최하는 아우구스부르크 회의에서 하인리히 4세는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하인리히 4세는 당황했다. 더 이상 교황에 맞서 싸울 지지기반을 잃은 그는 무조건 복종을 맹세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안했기 때문에 교황을 직접 만나 용서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몰래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꽁꽁 얼어붙은 라인강을 건너고 눈 덮인 알프스를 넘었다.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었다. 교황은 이때 토스카나 백작 부인 마틸다의 카노사 성에서 휴양중이었다.

 

고생 끝에 간신히 도착한 하인리히 4세였지만 교황은 만나주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황제는 그 추운 겨울날 얇은 옷에 맨발로 눈속에서 서서 꼬박 3일 밤낮을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그제야 교황은 접견을 허락하고 교회에 복종할 것을 서약받은 다음 파문을 취소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성직임명권을 둘러싼 교황과 황제의 싸움은  일단 교황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돌아온 하인리히 4세는 왕권을 재건하는 데 힘을 기울이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1080년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에 처하고 새 황제를 승인했지만 이번엔 하인리히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독일 성직자들과 제후들을 소집, 도리어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하고 클레멘스 3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두고 봐라. 지난번 당한 모욕을 몇십 배로 갚아주마.'


1082년 하인리히 4세는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로마를 점령하고 클레멘스 3세의 교황취임을 교황청에 승인시켰다. 


살레르노 지방으로 피신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85년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한 까닭으로 유배신세를 면치 못하고 죽는다.'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의 싸움은 하인리히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교황과 황제의 치열한 대립이 일단락된 것은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가 모두 죽고 난 다음이었다. 


성직 임명은 교황의 권리로 하되 성직자에게 내리는 토지는 국왕의 권한하에 둔다는 타협안이 보름스 화의에서 통과된 것이다. 


그러나 교회와 교황의 권위는 날로 막강해져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나님 다음의 지위에 있게 되었다. 교황권이 절정에 달한 것은 인노켄티우스 3세(재위1198-1216)때이다. 이때, '교황은 해, 황제는 달'이란 말 그대로 황제의 권위는 막강한 교황권 앞에서 빛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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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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