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기제승 (出奇制勝)

出(날 출) 奇(기이할 기) 制(마를 제) 勝(이길 승)

특출한 전략을 이용하여 승리함.

  

사기(史記) 전단(田單)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민왕( 王)은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가, 연(燕)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제나라는 민왕의 먼 친척인 전단장군의 선전(善戰)으로 거성( 城)과 즉묵(卽墨)성은 잃지 않았다. 


그후 연나라의 소왕의 뒤를 이어 혜왕(惠王)이 즉위했다는 사실을 안 전단은 간첩을 보내어 악의와 혜왕을 이간질하였다. 그 결과 연왕은 악의 대신 기겁(騎劫)을 보냈다. 기겁의 학대를 받은 연나라 군대는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전단은 이 틈을 노려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는 한밤중에 꼬리에 횃불을 단 소들을 이용하여 연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사마천은 손자(孫子)의 말을 인용하여 전단의 용병술을 묘사하였다. 전쟁이란 정면으로 대치하여 싸우나, 유격(遊擊)인 기병(奇兵)을 가지고 이기는 것이다. 전쟁을 잘하는 자는 기병을 쓰는 방법이 무궁무진하다(兵以正合, 以奇勝. 善之者, 出奇無窮) 라고. 


출기제승(出奇制勝) 이란 특출한 전략을 이용하여 승리함 을 뜻한다. 


  



개문읍도 (開門揖盜)

開(열 개) 門(문 문) 揖(읍할 읍) 盜(훔칠 도)

스스로 화를 자초함.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 손권전(孫權傳)의 이야기다. 

동한(東漢) 말년, 조정의 통제력이 상실되자, 강동(江東)의 손책(孫策)은 자신의 세력 기반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에 강동 오군(吳郡)의 태수인 허공(許貢)은 황제에게 밀서(密書)를 보내 손책을 제거할 것을 건의하고자 하였으나, 손책에게 발각되어 죽고 말았다. 


한편 사냥을 나갔던 손책은 허공에게 큰 은혜를 입은 식객들이 쏜 화살을 맞아 죽었다.  당시 손책의 아들 손권(孫權)은 겨우 15세. 부친의 죽음을 비통해 하며 군정을 살피지 않자, 장소(張昭)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였다.  


지금 간사한 무리들이 우리들을 뒤쫓아오고, 이리 같은 놈들이 도처에 숨어 있는데, 자네는 부친의 

죽음만을 슬퍼하고 대사(大事)를 돌보지 않고 있으니, 이는 문을 열어 도둑을 맞아들이는 것과 같네(是猶開門揖盜). 


개문읍도(開門揖盜) 는 개문납적(開門納賊) 이라고도 하며, 스스로 화를 자초함 을 비유한 말이다. 



  


이대도강 (李代桃)

李(오얏 리) 代(대신할 대) 桃(복숭아나무 도) (쓰러질 강)

형제가 함께 어려움을 겪으면서 서로 돕고 사랑함.

  

악부시집(樂府詩集)인 상화가사(相和歌辭) 계명(鷄鳴)에 나오는 이야기다. 

옛날 어떤 집에 다섯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조정의 대신(大臣)이었다. 그들은 표면상 우애가 좋은 것 같았지만, 사실은 서로 다투고 시기하였다. 


그 중 한 형제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하게 되었는데도, 나머지 형제들은 그의 불행을 즐기는 눈치였

다. 벼슬을 하는 형제들이, 황금 장식으로 치장한 말이 끄는 화려한 꽃수레를 타고 고향에 올 때면, 길거리는 늘 구경꾼으로 붐볐다. 


그러던 어느 날, 관직에서 쫓겨난 그 형제의 집 우물가에 있던 자두나무가 갑자기 말라 죽었다. 죽은 자두나무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옆에 있던 복숭아나무의 뿌리는 벌레들에게 모두 갉아 먹혀있었다. 


이에 관직을 잃은 그 형제는 소리치며 울었다.  자두나무야! 자두나무야! 벌레 먹힌 것은 복숭아나무인데, 네가 죽다니, 이게 무슨 까닭인가? 


이대도강(李代桃僵)은 형제가 함께 어려움을 겪으면서 서로 돕고 사랑함을 비유하며,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것 을 뜻하기도 한다. 





거조실당 (擧措失當)

擧(들 거) 措(둘 조) 失(잃을 실) 當(당할 당)

조치가 정당하지 않음.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의 이야기다. 

진시황 26년, 즉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진시황은 곧이어 전국을 36개 군(郡)으로 나누고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였다. 이듬해, 진시황은 위덕(威德)을 선양하기 위하여 천하 주유에 나섰다. 


기원전 219년, 진시황은 태산(泰山)에서 제사를 지내고, 다시 남쪽으로 낭야산(琅邪山)에 올랐다. 이곳에서 진시황은 낭야대를 쌓고, 비석을 세워 자신의 공덕(功德)과 진나라 왕조의 덕정(德政)을 담은 비문(碑文)을 새겼다.   


진시황께서는 백성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조석으로 게으름을 피지 않으시고, 의혹을 제거하고 법령을 제정하시니 백성들이 모두 법으로 금한 일을 피할 줄 알게 되었다. 지방장관의 직무가 나뉘어서 모든 정무의 시행이 용이해지고, 모든 조치가 타당하여 바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擧錯必當, 莫不如畵). 


거조실당(擧措失當) 이란 조치가 정당하지 않음 을 뜻한다. 


  



음수사원 (飮水思源)

飮(마실 음) 水(물 수) 思(생각할 사) 源(근원 원)

근본을 잊지 않음을 비유한 말.

  

남북조(南北朝)시대, 북주(北周)에 유신(庾信)이라는 문인(文人)이 있었다. 

(字)는 자산(子山)이었다. 서기 554년, 그는 양(梁)나라 원제(元帝) 소역(蕭繹)의 명을 받들어 서위(西魏)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장안(長安)에 도착하였다. 유신이 고국을 떠나와 있던 동안, 양나라는 서위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유신은 당시 문단(文壇)에서 그 명망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서위의 군주는 그를 강제로 장안에 잡아두고 대관(大官)으로 삼았다. 유신은 고향을 떠나 북조(北朝)에서 28년 동안 머무르며 고향을 매우 그리워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런 마음을 유자산집(庾子山集) 칠권의 징주곡(徵周曲)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일을 먹을 때는 그 열매를 맺은 나무를 생각하고(落其實者思其樹),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네(飮其流者懷其源). 


음수사원(飮水思源) 이란 음수지원(飮水知源) 이라고도 한다. 이는 근본을 잊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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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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