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불식정 (目不識丁)

目(눈 목) 不(아닐 불) 識(알 식) 丁(고무래 정)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를 비유.

  

신당서(新唐書) 장굉정(張宏靖)전에 실린 이야기다. 

당(唐)나라 목종(穆宗) 시기, 정치는 부패하고 관리들의 생활은 방탕하기 짝이 없었다. 유주(幽州) 절도사(節度使) 장굉정의 막료인 위옹과 장종후 등은 매일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즐겼다. 


관아(官衙)를 나서고 돌아올 때에는 앞뒤에 호위를 세우고, 등불을 환하게 밝히며 추태를 부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믿고, 하급 군관들이나 사병들은 아예 안중에 두지도 않았으며, 항상 그들은 때리고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어느날, 그들은 수하(手下)의 한 군관을 꾸짖으며 지금은 태평성대이므로 천하에는 전쟁이 없다. 너희들이 아무리 두 석 무게의 석궁을 끌어 당길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丁 자 하나 아는 것만도 못하다(汝輩挽得兩石力弓, 不如識一丁字) 라고 하였다.


목불식정(目不識丁) 이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 을 비유한 말이다. 

  


  

안중정 (眼中釘)

眼(눈 안) 中(가운데 중) 釘(못 정)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눈에 거슬리는 사람 을 비유한 말.

  

신오대사(新五代史) 조재례전(趙在禮傳)에 실린 이야기다. 

오대(五代) 후당(後唐)시대 당(唐)나라의 명종(明宗)이 재위할 때, 송주(宋州)의 절도사로 조재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포악한 정치때문에 많은 백성들은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반발하거나 불평하지 못했다.


조재례가 송주를 떠나 영흥(永興)으로 옮긴다는 소식에 송주 백성들은 모두 조재례가 떠난다니, 마치 눈에 박힌 못이 빠진 것 같은데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나(眼中拔釘, 豈不樂哉) 라며 기뻐했다. 


그런데, 이 소식이 조재례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곧 황제에게 송주의 절도사로 유임(留任)하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제는 조재례의 뜻이 백성들의 희망때문인 것으로 알고, 그로 하여금 유임하도록 했다. 다음 날, 조재례는 즉각 명령을 내려,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못을 뽑아내는 비용으로 일인당 1천문의 돈을 내도록 하고,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형에 처하였다.


안중정(眼中釘) 이란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종남첩경 (終南捷徑)

終(끝날 종) 南(남녘 남) 捷(빠를 첩) 徑(지름길 경)

명리(名利)를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을 비유한 말.

  

신당서(新唐書) 노장용전(盧藏用傳)에 실린 이야기다. 

당나라 때, 노장용이라는 유명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시(詩)와 부(賦)에 뛰어났다. 그는 진사에 합격했지만,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관직을 받지 못하였다. 


그는 조정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곧 당시의 수도인 장안(長安) 근처에 있는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매일 심신을 수양하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노장용은 정말로 황제의 부름을 받고 관직을 얻게 되었다. 부임 길에 오른 그는 몹시 기쁜 마음에 종남산을 가리키며 이 산 중에는 아름다운 곳이 많도다(此中大有嘉處) 라고 하였다. 


이 당시 사마승정(司馬承禎)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도 벼슬을 하지 않고 종남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노장용의 말을 듣고는 그의 속뜻을 알아 차리고 조롱하듯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 종남산은 벼슬의 지름길일 따름이다(仕官之捷徑耳). 


종남첩경(終南捷徑)이란 명리(名利)를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을 비유한 말이다. 

  


  

별무장물 (別無長物)

別(나눌 별) 無(없을 무) 長(길 장) 物(만물 물)

곧 필요한 것 이외에는 갖지 않음.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동진(東晋)시기, 왕공(王恭)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태자(太子)의 스승을 지낸 사람이었지만 생활이 

매우 검소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어느 날, 그가 회계(會稽)에 갔다가 수도인 남경(南京)으로 돌아오자, 왕침(王 )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왕침 또한 태자의 스승을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는 왕공이 새로운 대자리에 앉아 있음을 발견하고, 이 멋있는 대자리는 필시 회계의 명물(名物)일 것이며, 하나만 사가지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였다. 왕침이 대자리를 자기에게 달라고 하자, 왕공은 자기가 앉아 있던 하나뿐인 대자리를 그에게 내주었다. 


그 후, 왕공은 풀로 엮은 헌 자리를 깔고 생활하게 되었다. 이 일이 왕침에게 알려지자, 그는 서둘러 왕공의 집으로 달려와서 그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왕공은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직도 저를 잘 모르시는군요. 이제껏 저는 물건을 남도록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恭作人無長物). 


長物 은 여분(餘分) 이라는 의미이니, 별무장물(別無長物) 이란 곧 필요한 것 이외에는 갖지 않음 을 뜻한다. 

  

  


  

할석분좌 (割席分坐)

割(나눌 할) 席(자리 석) 分(나눌 분) 坐(앉을 좌)

친한 사람과의 절교(絶交) 를 비유한 말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편에 실린 이야기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에 관녕(管寗)과 화흠(華歆)이라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어렸을 때 함께 공부하였지만, 성격은 크게 달랐다. 


관영은 검소하고 학문을 즐겨 부귀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화흠은 그렇지 않았다. 화흠은 한(漢)나라의 태수(太守)를 지내다가, 한때 오(吳)나라의 손책(孫策)의 휘하에서 일을 하였으며, 후에는 위나라의 조비(曹丕)를 도와 한나라를 찬탈하였다. 그러나 관녕은 위나라에서 내린 벼슬을 끝내 사양하였다.


하루는 두 사람이 함께 한 돗자리를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때마침 멋있는 의관(衣冠)을 입은 높은 관리가 수레를 타고 지나갔다. 


관녕은 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책을 읽었으나, 화흠은 곧 밖으로 나가 그 관리의 행차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관녕은 화흠의 태도에 몹시 분노하였다. 그는 칼을 꺼내더니 함께 깔고 있던 돗자리를 반으로 자르고 따로 앉아, 자네는 이제 나의 친구가 아닐세 라고 말했다(寗割席分坐曰:子非吾友也).


할석분좌(割席分坐) 란 친한 사람과의 절교(絶交) 를 비유한 말이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전화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