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51. 징기즈간의 후예에 맞선 한족
홍건적의 난(1351년)
북방 유목민인 몽고족의 중국지배 동안 중국의 한족들은 매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민족에 따라 차별적인 통치방법을 썼던 원의 지배 아래서 한족들은 가혹한 처지에 잇었다. 특히 양자강 이남의 옛 남송지역 사람들은 몽고에 끝까지 저항한 데에 대한 보복으로 심한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한족에 대한 가혹한 탄압과 착취는 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원 말기의 저항의 무리 중 대표적인 것이 백련교라는 종교를 기반으로 하여 조직된 홍건적이었다.
백련교는 남북조 시대 동진의 승려인 혜원에 의해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종파였다. 백련교는 미륵불을 숭배했는데, 미륵불이란 세상이 말세에 이르면 세상을 개벽하러 내려온다는 미래불이다.
즉, 지상천국을 세우게 되는 부처였다. 미륵불 숭배는 원나라의 가혹한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한족의 염원의 상징이었다. 홍건적은 백성들의 이러한 염원을 바탕으로 그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백련교를 중심으로 한 홍건적 조직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곳은 황하의 남쪽인 하남지방이었고, 이 지역은 특히 원나라의 착취로 인한 고통에다 황하의 범람 등과 같은 자연재해가 겹쳐 백성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했다. 굶주림과 고통에서 허덕이고 있는 백성들에게 새 세상을 열어준다는 미륵불은 그들에게 한 가닥 희망의 등불이었다.
홍건적의 중심인물은 하남의 영주지장 사람 유복통과 한산동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을 끌어모으는 데는 상징적인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상 대대로 백련교의 핵심인물이었고 교주라고 할 정도의 위치에 잇던 한산동을 지도자로 추대했다.
백성들은 미륵불의 세상이 오리라는 것을 외치는 이들에게 모여들었다. 세력이 점차 확대되자 홍건적 지도자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한산동이 원래는 한씨가 아니라 원에 의해 멸망한 중국왕조인 송 휘종의 8대손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리기까지 했다.
그들은 마침내 1351년 한족의 옛 왕조 송을 부흥한다는 깃발을 내세우며 봉기했다. 송황조가 화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뜻을 계승하는 의미로 불을 상징하는 붉은색 머리띠를 둘렀다. 이 때문에 홍건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와 대결하려고 한 계획이 사전에 흘러나가 홍건적 조직의 우두머리인 한산동은 잡혀서 처형되고 이 조직을 주도했던 유복통은 간신히 피해 목숨을 건져 영주로 갔다. 한산동의 부인과 아들 한림아도 간신히 몸을 피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홍건적의 주모자들이 체포당해 처형되거나 도망함으로써 홍건적군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은 다시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흩어진 세력들을 모아 다시 조직을 정비한 홍건적은 한림아의 지도아래 하남지방의 여러 지역들을 차례로 장악하게 되었으며 그때마다 홍건적에 합세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늘어나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물론 홍건적 외에도 원의 중국 지배에 저항하는 세력은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각각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어 활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홍건적군이 원에 대항하는 각 지방의 반란군을 모두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국 도처에서 크고 작은 민란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시기이게 때문에 처음에는 원나라에서는 홍건적을 일상적으로 있었던 하찮은 농민반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건적군의 규모가 점차 늘어나 10여만 명에 이르게 되자 이제는 더 이상 그냥 놔둘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은 군대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홍건적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원나라의 거센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홍건적 무리들은 조직을 정비하고 내부의 결속을 더욱 다질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1355년 홍건적은 호주에서 한산동의 아들인 한림아를 황제로 세우고 나라 이름을 송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몽고적을 몰아내고 한족에 의한 국가를 세우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었다.
원의 토벌군은 홍건적의 중심부인 박주를 포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원의 공격을 받은 홍건적은 박주를 버리고 안풍으로 피한 후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원을 공격했다.
그러나 군대를 분산시켜 공격을 하게 했던 것은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잘못된 작전이었다. 군대의 힘을 집중치켜 상대의 주력부대를 공격했어야 했던 것이다.
홍건적과 원나라간의 밀고 밀리는 접전은 여러 해 계속되었으며, 한때 홍건적의 일파가 원나라의 수도인 북경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원나라의 사령관 차칸테무르의 공격을 받은 홍건적은 관중의 농지방에서 포위를 당해 100일을 갇혀 있다가 황제인 한림아 등 몇몇 주동자들만 간신힌 탈출하여 안풍으로 밀려났다.
원나라의 공격은 계속되어 마침내 홍건적의 핵심 거점인 안풍을 포위했다. 홍건적군은 호주에서 원나라에 반대하여 세력을 펴고 있었던 주원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주원장은 처음에는 백련교 조직과 관련이 있었으나 홍건적에 포함된 세력은 아니었다. 구원 요청을 받은 주원장은 군대가 안풍에 도착하기도 전에 안풍은 함락되었다. 그리고 홍건적군의 핵심인물이었던 유복통은 여기에서 원나라 군대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민족인 몽고족의 지배를 벗어나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홍건적은 안풍의 함락과 주동자들의 죽음으로 끝을 맺게 된다. 홍건적의 마지막 상징이었던 송 황제 한림아는 안풍에서 탈출하여 주원장의 보호를 받게 되었는데, 그의 생애 마지막 부분은 묻혀지고 말았다.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심이 있엇던 주원장이 한림아를 죽였다고 하기도 한다.
이렇게 홍건적의 봉기는 실패로 막을 내렸으나 원나라의 중국지배는 더 많은 한족들의 저항을 받게 되었고, 결국 몽고족들은 150여년만에 다시 그들의 고향인 몽고지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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