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28. 고구려와의 전쟁. 수나라의 멸망(618년)




수나라라는 초강대국의 출현으로 동아시아는 팽팽한 긴장상태에 들어갔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 이미 중국의 군현을 몰아낸 지 모래였으며, 오히려 중국의 분열을 이용, 고도의 양면 외교를 펼칠 만큼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특히 삼국의 선두주자이며 거란이나 말갈족의 지배를 두고 중국과 국경을 다투는 만주의 실력자 고구려의 존재는 수나라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한편, 서북의 돌궐도 북주와 북제의 분열을 교묘히 이용, 급속한 신장을 거듭, 커다란 유목국가를 건설하고 있었다.


수나라는 '왼쪽 눈으로 돌궐을 무섭게 쏘아보고, 오른쪽 눈으로는 고구려의 동정을 주의깊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궐은 '가한'이라고 불리는 제왕의 지위를 둘러싼 내분에 들어갔고, 수는 이를 교묘히 이용, 제국을 동서로 분열시키는 공작에 성공했다.



고구려는 수왕조가 수립되자 곧바로 사절을 보내 수의 책봉체제에 들어갔으나, 남조의 진왕조와의 교섭도 단절하지 않은 채 사태를 낙관하고 있었다. 


중국의 책봉에서 고구려가 받은 칭호는 '요동군공 고구려왕' 정도였다. 그러나 진이 너무도 쉽게 멸망 해버리자 잠시 당황했던 고구려는 방위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돌궐과 연합을 꾀하면서 적극적인 대비책을 강구했다.


일촉즉발의 양국의 대치상태는 양원왕을 이은 영양왕이 사죄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잠시 평온을 유지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문제는 고구려가 (조공을 게을리하고 신하의 예를 결여했다)는 명분으로 수륙 30만 대군을 일으켰다. 결과는 수의 참패였지만, 고구려측의 손실도 엄첨났다. 수의 침공을 물리친 고구려는 다시 형식적인 사죄의 사자를 보내기로 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면서 국력을 정비했다.


양제는 다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구려 침공에 매달렸다. 607년의 어느 날 양제가 돌궐 가한의 막사를 방문했는데, 때마침 그곳에 머물고 있던 고구려 사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돌궐과 고구려의 결탁은 수로서는 커다란 위협이었으며, 게다가 고구려의 남하를 경계한 백제와 신라의 요청은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뒷날, 수는 백제에게 고구려의 동정을 탐색하는 일을 의뢰했으나, 백제는 막상 수의 침공 때에는 중립을 지켰다.


612년 1월, 드디어 양제는 고구려를 '군신의 예를 어기는 자'라고 힐책하면서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다. 


대운하의 북쪽 종점인 북경에는 113만의 대군이 집결했고, 보급부대의 숫자는 그 2배를 넘었다. 병사들의 행렬은 장장 480킬로미터에 달해 출발에만 40일이 걸렸다. 수군 정예부대 4만 명도 산동반도를 떠나 평양으로 진격했다.


육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공격함으로써 서전을 장식했다. 그러나 요하를 건널 때부터 이동식 다리, 부교가 설계 착오로 짧게 만들어져 전쟁도 하기 전에 많은 사상자를 낸데다가, 요동성의 철통같은 방비는 대군의 3개월간의 공격에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수군도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외곽까지 진격했으나, 고건무가 지휘하는 결사대 500명의 습격을 받아 대패했다. 양제는 할 수 없이 30만 정예로 별동대를 편성하여 평양성 공격에 나섰다. 


이때 고구려의 총지휘관은 을지문덕. 그는 수의 별동대를 깊숙이 끌어들인 후 일시에 섬멸하는 작전을 세워놓고, 예정된 후퇴를 거듭했다. 수나라 군대는 하루 7번 싸워 7번 이기는 승전을 거듭하며 평양성에 닿았다.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평양성 북방 30리에 병영을 설치한 수의 명장 우중문에게 을지문덕의 시 한 수가 날아왔다.



  귀신같은 책략은 천문을 꿰뚫고

  기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도다.

  싸워서 이긴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함을 알아서 그치기를 바라노라.



우중문은 서둘러 총퇴각을 명령했으나 그의 깨달음은 너무 늦은 뒤였다. 먼길을 떠나온 수나라의 병사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고구려의 복병은 퇴각하는 수나라의 병사들은 사면에서 공격해댔다. 


패주하던 수나라 군대가 살수(청천강)를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은 막아놓았던 강물을 일시에 터뜨림으로써 수나라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30만 별동대 중에 살아서 돌아간 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 이것이 세계 전투사에 빛나는 살수대첩이다.


1차 원정에서 뼈아픈 참패를 당한 양제는 다음해에도, 또 그 다음해에도 고구려 원정을 감행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수나라 백성들 사이에서는 (요동에 가서 개죽음 당하지 말자)는 노래가 유행했다. 백성들은 더이상 무모한 고구려 원정에 동원되어 헛되이 인생을 마감하기를 원치 않았다. 


민심이 떠난 것을 알아챈 지방의 유력자들도 수왕조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2차 고구려 원정에서 수군이 급거 철수하게 된 것은 보급을 담당했던 양현감의 반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나라는 거듭된 고구려 원정의 실패를 계기로 몰락의 길을 치닫게 되지만, 그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외부의 고구려가 아니라 중국 내부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각처의 반란으로 궁지에 몰린 양제는 강도에서 시국을 점치고 있던 중, 결국 자신의 친위대장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함으로써 50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그때가 618년, 수가 건국된 지 불과 2대 37년이 경과하고 있었다.


'주모자가 누구냐?'


죽음 직전, 양제의 호통에 들리는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온 천하가 똑같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어찌 한 사람에 그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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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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