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80. 군웅할거하는 군벌들. 군벌시대(1910~20년대)
중국이 외세를 몰아내고 근대적인 민주적 민주국가로 향하는 길목에 넘어야 할 산은 외국세력과 아울러 내부에도 있었다. 그 세력은 이른바 군벌이라는 이름의 보수세력이었다.
원세개의 죽음 이후 약 10여년간은 반민족적 군벌의 시대라고 할 만큼 이들의 세력은 중국을 좌우하고 있었다. 중화민국의 진로가 순탄하지 못했던 요인 중의 하나는 군벌로 대표되는 이들 반민족적 보수세력의 존재였다.
군벌의 뿌리는 양무운동기의 이홍장의 군사력 강화과정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군벌의 시대라고 하면 원세개가 죽은 후 단기서와 풍국장 등이 중국정부를 이끌던 시기를 말한다.
그들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각각의 근거지를 장악하였는데, 그 군사력 유지를 위한 막대한 군사비는 농민과 상인에 수취, 또는 폭력적 방법을 통한 약탈 등으로 조달했다. 또한 군벌 자체가 대지주이거나 기업에 투자하는 대자본가이기도 했다.
군벌의 중심부대는 빈농, 도시 유이민, 비적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빈번한 군벌전쟁, 막대한 군비조달을 위한 가혹한 세금수탈 등으로 삶의 근거를 잃은 농민들이 군벌의 용병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장악한 지역 내의 백성들로부터 각종 세금을 거둬들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아편의 재배, 판매 등으로 돈을 벌었으며 외국의 차관을 도입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개인적인 권력을 위해 국민을 수탈하거나 외국과 손을 잡고 중국의 이권을 넘기는 대가로 차관을 빌리거나 하여 중국의 근대적 민족국가 수립에 방해되는 암적 존재들이었다.
군벌들은 열강의 군사정치적 후원을 발판으로 세력확대를 꾀했다. 단기서 정권은 대일차관과 무기원조를 받았으며, 만주의 장작림은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일본의 기대를 배반한 후 열차폭파로 죽음을 당하는 말로를 겪기도 했다.
군벌은 크게 북양군벌과 서남군벌로 갈라지는데, 북양군벌은 주로 북경을 중심으로 하여 원세개 사후 북경정부의 권력을 장악했던 세력이다. 대표적으로 단기서, 풍국장, 오패부, 장작림 등이 있다.
20세기 초에 서남지역을 제외한 중국의 대부분 지역은 원세개의 북양군의 세력에 놓이게 되었고, 원세개의 부하인 단기서, 예사충 등이 각 지역의 도독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들이 원세개가 죽은 후 각 지역의 군벌로서 그 지역을 장악한 것이다.
각 지역의 여러 군벌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원세개 총통 때 육군총장의 자리에 있었던 단기서, 직례도독이었던 풍국장 등이다. 원세개의 뒤를 이어 중앙정부를 장악한 군벌은 단기서였다.
그는 자시의 정책에 반대하는 기존의 국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국회를 구성하면서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자기 세력을 국회에 심었다. 또한 그러한 권력강화를 위해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빌었다. 물론 일본에게 산동지방의 이권을 넘겨주는 대가였다.
그 상황에서 단기서에 실질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또 다른 군벌인 직례지역의 풍국장 세력이었다. 결국 두 군벌세력은 타협하여 양 세력에 중간의 위치에 있는 문관출신 서세창을 새로운 총통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남쪽의 혁명세력은 북경의 군벌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을 계속했고, 1919년 2월에는 군벌과 남경정부 세력간에 '남북화의'가 진행되었으나 별소득없이 결렬되었다.
한편,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회담이 열렸을 때 군벌정부는 일본과 했던 약속과 일본의 외교적인 수완에 말려 산동지방의 이권을 되찾는데 실패하는 무능을 드러내보였다. 이는 중국인민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켜 5, 4운동을 촉발시켰다. 군벌정부의 반민족적 자세에 대한 중국인들의 대대적인 저항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군벌을 무너뜨리는 데까지 미치지 못했다. 군벌시대는 계속되었으며 군벌 사이의 세력확대를 위한 대립은 마침내 전쟁으로까지 번졌다. 당시 군벌세력을 양분하고 있었던 직례파는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결국 직례파가 단기서의 안휘파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단기서 군벌정권은 붕괴되었다.
그 후 직례파 군벌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자 그들과 제휴하여 안휘파를 밀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장작림이 이끄는 봉천파가 직례파에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 대립은 1922년 전쟁으로 폭발했고 역시 직례파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제 직례파 군벌은 북경의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한 무력통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들의 싸움은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중국인민들의 생활을 개선시키기 위한 명분을 가진 싸움도 아니었다. 중국대륙의 패권을 차지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목적이었다.
이 권력다툼의 틈바구니에서 고통당하는 것은 민중들이었다. 군벌의 이와같은 움직임은 중국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군벌간의 세력다툼이 계속되면서 국민들이 더욱 등을 돌리게 되었다.
군벌세력이 서로 싸우고 있던 이 시기, 혁명세력은 군벌을 바로 몰아낼 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서남지역의 일부 군벌세력들과 연합하는 등으로 그들의 세력범위를 계속 확대했다.
마침내 1926년 국민당의 장개석 사령관은 대대적인 북벌을 선언하고 군대를 몰아 광동으로부터 북경을 향하는 북벌운동을 단행하게 된다. 군벌타도는 곧 신해혁명의 뜻을 잇는 국민혁명의 연속되는 과정이었다.
광동을 떠난 국민당의 북벌군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전진을 계속하여 6개월여 만에 양자강 유역을 장악했다. 군벌들에게 고통당하고 있던 민중들은 당연히 북벌군을 크게 환영했으며, 군벌세력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광동 국민정부 군대는 계속 각지의 군벌들을 격파하면서 북상했고, 1928년에는 동북지방의 유력한 군벌이었던 장작림이 일본군의 계략에 의해 열차여행 중 폭사당함으로써 비로소 군벌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의 완전한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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