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10. 후진국 진의 대약진
고대 아시아 최대의 역사적 사건이라면 아마도 기원전 3세기 말에 이루어진 중국의 통일일 것이다. 그것은 거대하고 장구한 중국적 세계의 커다란 틀거리가 처음으로 완성된, 첫 중화제국의 출현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통일전쟁을 일으킨 지 불과 10년 만에 이루어졌다. 진시황은 기원전 230년 한나라를 정복한 것을 시작으로, 조, 위, 초, 연을 차례로 멸하고,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의 대업을 완성했는데, 그때가 기원전 221년이었다.
그러나 통일은 그렇게 쉽사리 이루어진 것도, 진시황 개인의 영웅적 역량에만 의존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4세기 중엽, 상앙의 개혁으로부터 준비되어온 것이니, 진시황이 최초로 통일을 이룬 시점으로부터 장장 130년 전의 일이었다.
상앙은 위나라 사람으로 진의 효공 때 재상으로 등용되어 개혁에 착수했다. 개혁의 목적은 엄격한 법의 집행을 통해 부국강병을 적극 도모, 강력한 왕권을 출현시키는 데 있었다.
이러한 개혁의 움직임은 이미 전국 초기, 중원의 선진 제국에서 시도되고 있었다. 뒷날 법가의 시조로 추앙받은 이회는 이미 위나라에서 개혁의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중원 제국은 전통 귀족을 중심으로 한 구체제의 반발이 너무 거셌고, 각국이 서로 밀집, 각축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변혁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데, 그곳은 춘추시대까지 변방의 후진국에 불과했던 지나라였다.
이 시기에 변방의 후진국이 선진국 주도의 판도를 깨도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중원의 선진국보다 상대적으로 귀족들의 힘이 약해 과감한 혁신책의 시행이 가능했으며, 주변의 황무지를 개척하여 농지를 확대하는 등 경제력을 탄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앙의 개혁도 철제 농기구의 사용과 우경으로 새로운 국면에 돌입한 농업의 발전을 적극 도모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생산기술의 발달로 농경방식이 집단경영에서 소가족 단위의 경영으로 변화하자 씨족 공동체는 심각하게 붕괴되어갔다.
상앙은 소가족의 독립을 적극 추진하고, 수리공사를 일으키는 등 이를 지원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을 꾀했다. 부자형제간의 분가가 적극 추진되었고, 변방의 황무지는 비옥한 농토로 바뀌어갔다.
진나라라 한들 귀족들의 반발이 없었을 리는 만무하다. 종래에 귀족들은 씨족 공동체가 지배하는 농촌에서 농민들을 지배하고 국가의 관직을 독점, 세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가족 생산방식이 확대되면서 씨족 공동체는 점차 해체되어갔고, 독립된 농가는 이제 귀족이 아니라 왕권에 의해 직접 통제되어갔다.
상앙은 귀족들의 각종 특권을 폐지했으며, 평민이라 할지라도 전투에서 뛰어난 공적을 세운 이에게는 관작과 토지를 주었다. 작은 취락을 통합하고 현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권력의 중앙집중을 강화하고, 연좌제를 실시, 농민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강화했다.
이제 왕은 호적을 작성하고 군현을 직접 지배했으며, 광범하게 성장한 자영농민층으로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재정의 수요를 충당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쟁병력을 충원, 강력한 군대를 구성할 수 있었다.
물론 상앙의 개혁은 오로지 효공의 절대적인 지지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효공이 죽자 상앙은 귀족들에의해 '거열의 형'에 처해져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거열의 형이란, 머리와 사지를 각각 수레에 매단 후 말을 달리게 하여 신체를 찢는 형벌이었다. 이 형벌은 상앙이 창안한 형벌이라고 한다.
상앙은 죽었으나, 그의 법가정신은 후대의 왕들에게 계승되어 착실한 성과를 거두었고, 진의 국력은 눈부시게 성장, 전국 7웅 중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기원전 4세기 말, 혜문왕 때에는 역시 위나라 출신의 재상 자의가 교묘한 외교술로 동방 6국의 연합세력을 분쇄했는데, 이는 합종책에 대한 여횡책의 승리로 일컬어진다.
합종책의 대가는 소진이다. 장의와 소진은 함께 귀곡자에게 외교술을 배웠던 역사상의 라이벌이었다. 한치의 혀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이들의 외교술은 전국시대를 풍미했다.
학업을 마친 장의가 제후들에게 유세를 다니고 있던 어느 날, 귀족에게 도둑의 혐의를 받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주장, 수백 대의 곤장을 맞고 풀려난 일이 있었다.
그의 아내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아아, 당신이 독서와 유세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치욕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의가 혀를 내밀면서 물었다.
(내 혀가 온전한가, 어떤가?)
(혀라고요? 있는데요!)
장의가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그러면 되었네!)
진의 통일은 상앙 때부터 이루어진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장의로 대표되는 뛰어난 외교정책, 범수의 유명한 원교 근공책 등 뛰어난 군사전술이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가까운 나라를 먼저 공격하되, 먼나라와는 친교를 맺으니, 각국은 고립된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각개격파되었다. 각국의 성벽은 허물어지고, 중국적 세계는 최초로 하나의 국가 틀 속에서 다스려지게 되었다.
전국 말기, 진나라를 방문했던 순자는 진나라의 풍부한 자원과 정연한 질서에 감복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나라가 승리를 얻어온 것은 요행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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