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컴 1994년 1월호 - 사람과 일 

 한글 프로그램 언어 '씨앗' 탄생록 

 

 

 

" '씨앗'은 프로그램 언어입니다.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산업 발전을 위한 씨앗이 되기를 바라면서 나눔기술에서 만들었습니다."

 


나눔기술이 개발한 프로그램 언어, '씨앗'을 실행하면 이런 글이 나타난다. '씨앗'은 프로그램 언어다. 그렇지만, 늘상 얘기되던 그런 건 아니다. 씨앗은 프로그램 언어라면 코볼, 포트란, 파스칼, C, 어셈블러, 베이직 같은 영어 단어만을 떠올리는 우리의 상식에 수정을 요구한다. 이름 그 자체로 이미 우리 냄새를 물씬 내는 씨앗은 본바탕의 다름을 조용히 내비친다.

 

프로그램 명령어도 전부 영어인 영어 이름의 프로그램 언어와 달리, 씨앗은 한글로 프로그램 명령을 입력하는 한글 언어다. 한글 언어라는 말을 듣자마자 어떤 사용자들은 예전에 잠시 선보이고 사위어 간 한글 파스칼이나 한베 등에 대한 기억을 되새김질 해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한글 언어와는 다르다고 한다. 그 차이는 뭘까. 우선, 씨앗의 태동부터 살피자.

 

 

 

 

"프로그램을 우리 말로 짜면 더 빠르겠죠" 

'씨앗'이 처음 태동한 것은 89년, 그러니까 주 개발자인 나눔기술의 박석봉 이사가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나 프로그램과 인연을 맺게 되었죠. 지금 아이들과 비교하면 한참 늦은 나이지만, 당시는 그게 보통이었습니다. 직접 프로그램을 짜다보니 자연스레 프로그램 명령어가 우리 말이면 속도도 붙고 편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씨앗 개발을 시작하게 된 동기였다"고 박석봉씨는 말한다.


그의 표현을 빌고 기자의 생각을 더해 좀더 상세히 풀면 이런 논리다. 백미터 달리기를 한다고 비유하면 그들이 출발선을 20미터는 앞서서 달려가는거나 다름없다. 지금 우리 프로그램 개발 현실은 그렇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과 우리가 제 아무리 겨뤄봐야 본전치기도 안 된다.

 

그렇다고, 출발선이 다르니 시정하자고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정당당은 운동 경기장에서나 빛나는 정신이다. 현실은 사활을 건 전쟁터고, 생존을 위한 경쟁터이다. 전쟁터에서 정정당당한 겨룸을 상상하는건 한편의 코미디일 뿐이다.

 

이런 불평등(?)의 해소없이 그들을 따라 잡겠다는 자체가 돈키호테적인 발상이다. 억울하면, 우리 손으로 한글을 쓸 수 있는 프로그램 언어를 만드는 외에 달리 수가 없다.

 

대충 이런 관점에서 시작한 씨앗은 박석봉씨가 89년, 90년 사이에 학교 다니면서 혼자 프로그램 언어의 문법이나 용어, 어순 규칙 등의 기본틀을 잡았다. 본격적인 진행은 나눔기술에 입사하면서 시작되었고, 그후 3년여 씨름끝에 컴파일러와 링커, 기본 예제들까지 담은 버전 0.9가 발표되었다.

 

지금, 씨앗 개발은 모두 다섯명이 한다. 기본 틀을 잡고, 컴파일러의 전방처리기 작업을 맡은 박석봉(30)씨, 한글 입출력 문제를 해결하는 통합 환경 에디터 작업을 맡은 채희선(28) 씨, 컴파일러의 후방처리기 작업을 담당한 장충순(28)씨, 링커 개발에 전념하는 이명신(26)씨, 씨앗에서 편리하게 쓸 수 있게 하는 라이브러리 개발을 맡은 김성락씨(25) 씨가 팀을 이루고 있다. 공업화학을 전공한 채희선씨 말고는 모두 컴퓨터를 전공했다.

 

 

 

 

프로그램 짜보겠다고 책 한권 안 사본 컴퓨터 사용자가 누구이며, 컴퓨터 잘한다고 소문난 사람치고 프로그래머를 꿈꿔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쓸만한 프로그래머가 되려면 프로그램 언어 자체의 문법과 영어의 언어구조까지 체득해야 하는 겹고생을 통과의례처럼 치뤄내야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씨앗'은 그래서 태어났다. 한글 그대로 프로그램 명령어로 사용하고도 빼어난 애플리케이션 제작이 가능함을 보여주려고 만들어진 그런 한글 프로그램 언어다.

프로그램이 왜 좋으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들이 천상 프로그래머임을 증명한다.

"창조한다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프로그램을 짠 대로 컴퓨터가 움직였을 때 오는 즐거움."
“머리속에서 디자인하고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컴퓨터에서 돌렸는데 생각한 그대로 돌아간다. 바로 그런 것이 프로그래머란 직업의 매력."
“스트레스가 어떤 직업보다 심한 직업이다. 집중력이 굉장히 필요한 직업이다."
“프로그래머에게는 열정과 재능이 기본 조건이다. 그 중에 열정이 더 우선이다"

 

 

 


한글 환경 '태극'에서만 뿌려지는 '씨앗', 결실은 새내기들이 거두기를 바란다

씨앗은 그들이 개발한 '태극'이란 한글 환경에서만 돌아간다. 내장 한글도 고려해 봤지만, 한글 입출력 환경을 아예 따로 만드는 게 낫다고 판단해 새로 만든 것이 태극이다 (태극은 C언어와 씨앗의 한글 입출력을 지원한다).


그렇다면, 씨앗은 대체 어떤 언어인가. 아무래도 이미 유명해진 언어와 상대 비교하는 편이 이해가 쉬울 듯하다. 굳이 말하라면, 터보 파스칼과 C 언어가 합쳐진 것 같다는 게 개발팀의 설명이다. 파스칼을 개발한 니클라우스 워스(Niklaus Wirth) 가 두번째로 만든 언어, '모듈라-II'와도 많이 닮아 있단다.

 

C언어에 한창 푹 빠져있는 어느 학생은 씨앗을 써 보고 이렇게 평가했다. “C와 파스칼 언어 구조가 비슷해서 초보자들이 프로그램 언어 로직을 파악하는데 아주 좋을 것 같다" 고.


씨앗이 본래부터 새내기 교육용 언어로 만들어진건 아니지만, 씨앗팀이 기대하는 사용자 충도 그 학생의 평가에서 크게 이탈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직 외국 언어에 물들지 않은 새내기들로부터 희망의 빛줄기를 본다. 그건, 이미 다른 언어에 길들여진 사용자들의 거개는 이런 논리로 맞서오기 때문이다.


"한글 언어는 헷갈린다. 오히려 혼동이 오기 쉽다. 영어 명령어가 훨씬 프로그램 짜기 쉽다고".


그렇지만, 이런 주장은 한쪽에 경사되어 있다. 베이직을 처음 배우는 어린 꼬마들을 생각해보자. IF, NEXT, GOTO라는 베이직 명령어를 배우기 위해 그들은 먼저 'IF'라는 영어 단어의 '만약 ~이라면' 뜻부터 달달 외운다. 베이직 명령어 배우기인지, 영어 단어 외우기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다.

 

다른 프로그램 언어 공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머리 싸매고 공부한 대가로 한 언어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새로운 언어를 대하면 낯설어 하고 헷갈리는 게 당연하다. 3벌식 자판의 우수성을 아무리 떠들어도 2벌식에 이미 길들여져 상당한 타자 속도를 내는 사람들이 선뜻 자판 바꾸기를 감행치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점을 고려치 않고 낯설음을 곧 나쁨으로 예단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건 편견일 따름 이다.

 

 

 

 

 


'씨앗'의 미덕은 '한글답고 쉽다'는 데 있다 

취재를 시작하며 가졌던 씨앗과 다른 언어의 차이에 대한 궁금함은 취재를 마치면서 "한글 답다"는 한마디로 정리되었다. 다음 세가지 예 를 보자.


차이를 느낄 수 있는가? 특히 한글 번역과 씨앗에서. 그건 바로 영어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한 번역과 우리 말다운 번역이 보이는 차이다.

 

(2)번의 '만약'은 그저 'if'란 영어 단어의 단순 번역에 불과하다. '한글답게'라는 원칙과 더불어 '씨앗' 작성의 기본 원칙은 '알기 쉽게'였다. “프로그램 언어가 아니고 꼭 워드프로세서를 실행시켜 놓은 것 같다"는 사용자들의 반응은 씨앗이 갖춘 미덕을 반영한다.


개발 과정의 어려움을 묻자 특별히 얘기할 만한게 없다던 그들도 그것 하나만은 들었다. 명령어를 뜻이 통하는 우리 말로 바꾸기. 영한 사전에서 우리말 큰사전 (한글학회간)으로, 다시 한영사전을 뒤적거렸다.

 

또 다시 우리말 큰사전으로 오가야 했던 사전찾기 작업으로 엄청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 아쉬웠다는 그들의 이 노력은, 한글답고 알기 쉬운 프로그램 언어를 만드는데 있어 기본 작업이었다.

 

 

 

 


정보산업의 '씨앗'으로 뿌려져야

이후 계획이라면, 씨앗과 태극의 판올림은 당연한 것이고, 씨앗 보급을 원활하게 하는 데 필수적인 쓸만한 라이브러리 제작에 신경을 쓸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 씨앗을 팔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물론"이었다. 그들은 낙관한다. 이 순간에 취재 전부터 궁금했던 의문. 바로 그 질문을 던졌다.


이윤 추구가 목적인 기업에서 '씨앗'처럼 속된 말로 돈벌이가 시원찮아 보이는 프로그램 언어 개발에 손을 댄 이유가 뭐냐고.


" '우리 기술, 우리 힘으로'가 우리 회사의 표어와 같은 정신입니다. 이윤 추구가 기업의 목적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나눔'이란 회사 이름에서도 보이듯이 사회와 나누는 것도 기업의 또다른 역할"이라고 규정짓는 박석봉 이사는 씨앗에 대한 전망에 있어서도 비관적이지 않다. 기초 기술을 개발한다는 큰 꿈을 갖고 시작한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씨앗팀을 취재하러 서울 강남에 있는 나눔기술을 방문한 12월 8일은 쌀 개방 반대 시위를 위해 3만여명이 서울역으로 모인 날이었다. 바로 전날까지도 우리 먹을거리의 씨앗인 '쌀'은 절대 지키겠노라고 큰소리치던 당국에서 조변석개로 하루 만에 번복한 무책임한 처사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었다.

 

다음 날, 한 일간지에는 “뚫린 쌀둑, 일어서는 농심"이란 제목으로 두 쪽에 걸쳐 기사와 사진이 커다랗게 실렸다. 신문을 읽으며, 우리에게 뒤미쳐 닥칠지 모를 기사 제목이 하나 떠올랐다. "뚫린 정보산업, 일어서는 프로그래머". 그런 기사가 일간지를 장식할 날이 오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아니 우리는, 이미 구멍이 뚫려 물이 새 들어오고 있는데도 못 느끼는 심한 불감증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유명하다고 소문난 미래학자의 예측을 빌지 않더라도 시나브로 정보화 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 정보화 시대를 컴퓨터가, 컴퓨터는 소프트웨어가, 그리고 소프트웨어는 프로그램 언어로 만들어낸다. 가장 근간은 바로 프로그램 언어이다. 그 근간을 우리 것으로 쌓고 지킴이 되고자 하는 한글 프 로그램 언어, 씨앗.


이제, 소프트웨어 시장이란 토양에 '씨앗'이 제대로 뿌려져 잘 자라도록 북을 돋우고 싶을 세우고, 물길을 끌어주는 보(洑)를 대는 역할이 우리에게 남겨졌음은 덧붙힘이 사족이다.

 

 

 

 

 

  이글은 지금은 없어진 컴퓨터 잡지, 마이컴 1994년 1월호 기사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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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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