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42.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이, 진자 등시성을 발견(158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538년/당쟁 격화됨

 


1583년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예배당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천장에 매단 램프가 흔들리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문득 어떤 생각이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즉시 실험에 매달렸다.


얼마 후 그는 다음과 같은 위대한 발견을 했다. '추 무게의 무겁고 가벼움에 관계없이 추가 한 번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같다'는 사실이다. 이를  물리학에선 '진자의 등시성'이라고 한다. 갈릴레이의 나이 18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발표된 지 꼭 40년 만의일이었다. 


갈릴레이는 1564년 사탑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났다. 11살  되던 해 수도원에 딸린 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깊은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던 천동설을 부인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몰두하게 된 것도 이 당시의 깊은 회의와 연관이 있다.


3년 후 학교를 중퇴한 갈릴레이는 아버지를 따라 피렌체로 갔다가, 몇년 뒤 다시 피사로 돌아와 피사 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그를 의사로 만들고 싶어했지만, 그는 자연과학에 더 흥미를 느꼈다. '진자 등시성'을 발견한 후 그는 본격적으로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609년 그는 플랑드르 지방에 멀리 있는 물체를 가까이 보이게 하는 쌍안경이란 기구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야기를 들은 갈릴레이는 실물을 보지도 않고 즉시 망원경 제작에 착수했다. 


그리고 완성된 망원경으로 천체관측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목성의 주위를 네 개의 위성이 돌고 잇다는 것, 은하수는 무수한 별들의 모임이라는 것, 달에 잇는 산맥, 그리고 태양의 흑점 등을 발견해냈다. 그의 나이 45살 때의 일이다.


그는 단박에 유명해졌다. 여러 학자들이 그의 관찰결과를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천동설을 고수하고 있던 교황청은 그의 주장이 불합리하고 이교도적이라 하여 경고를 했다.


1623년 그의 옛 친구인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새 교황 우르반 8세로 선출되었다. 갈릴레이는 안심하고 연구를 계속했다.


1632년 오랜 연구 끝에 그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담아 (두 개의 주요한 우주체계의 대화)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교황 우르반 8세도 불쾌감을 드러냈다.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그럴 듯한 가설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자신의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1633년 6월, 가릴레이는 마침내 종교재판에 부쳐졌다. 재판관들은  그에게 자신의 이론을 철회하고 죄와 오류를 고백하면 용서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브루노처럼 담대한 인물은 못되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가릴레이는 법정을 나서면서 혼자 중얼거린 말이다. 그후 갈릴레이는 얼마간의 감옥생활을 거쳐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다가 1642년 연금 상태에서 사망했다.


그는 과학적 연구방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진정한 과학은 관찰, 실험, 그리고 수학의 결합으로만 가능하다고 하면서 망원경으로 직접 보지 않고 책상앞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교조주의자들을 비판했다.


그는 또 카톨릭 교회가 정통으로 인정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도전, 관성의 법칙을 발견해냈다. 그가 발견한 여러 법칙들은 뉴턴에게 전해져 근대 물리학을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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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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