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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12. 여산릉 병마용 허수아비의 노래



현대인의 과학지식과 지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고대의 상징물 -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진시황릉을 호위하는 병망용 갱 - 들을 대할 때, 우리는 흔히 불가사의라는 표현을 쓴다. 


그 거대한 위용, 그것을 가능하게 한 고대인들의 예지, 무엇보다도 그 위대한 건조물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음에야 달리 어떤 표현을 쓸 수 있겠는가? 


1974년 5월, 여산 북쪽의 옥수수밭에서 우물 공사를 하던 중국 농민들에 의해 '진시황 병마용 갱'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당시의 군단을 상징하는 3개의 땅굴에는 흙으로 구운 등신대의 7천여 병마용들이 마치 사열 직전의 군대처럼 엄숙한 대열을 이룬채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평균 1.8m, 등신대의 도용들은 흙으로 빚은 뒤 한번 가마에 굽고, 표면에 투명한 아교를 칠한 후 광물성 자연연료로 채색되었는데, 그 사실적 표현기법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도용들은 갑옷의 복장, 전차의 장식만으로도 그 병사의 계급을 알 수 있을 만큼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었으며, 당시 진나라 군대를 구성했던 지역민의 신체적 특색이며, 개개 병사의 표정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이 보였으며,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무기는 모두 실물이었다. 그 도용들이 자그마치 7천. 우리는 갱속의 병마용들이 함성을 지르며, 곧 군단의 나팔소리에 맞춰 행진이라도 할 것 같은 전율에 빠진다. 


갱 속의 전차가 바퀴 소리도 요란하게 굴러가고, 수많은 군마용들의 울음소리가 이내 들릴 것만 같다. 이들 병마용들이 향하고 있는 서쪽 1,500m 지점에는 진시황릉, 즉 여산릉이 있다. 바로 이들은 진시황을 호위하고 있는 것이다. 


여산릉은 지금도 끝없는 보리밭 사이로 우뚝 솟아 있다. 마치 자연적 구릉같이. 현재 능의 높이는 45m, 둘레는 약 2천m. 본래의 높이는 이보다 반 정도 더 높았다고 한다.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의 관은 지하수 층을 세 번이나 통과하도록 깊이 판 다음, 동판을 깔고 그 위에 안치되었다. 


능 안에는 지상의 궁전과 누각이, 묘실 위에는 일월성신의 천계가, 아래에는 중국의 산하가 재현되었는데, 무덤의 비밀이 밝혀질 것을 우려해서 마지막 기술공들의 출로를 폐쇄시켰다고 하며, 만일 무덤에 접근하는 자가 있을 때, 그들을 쓰러뜨리기 위한 자동발사 장치까지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여산릉은 항우가 함양을 점령했을 때 파괴되었다. 이 때 항우는 30만명을 동원하여 30일 동안 능 안의 보물들을 날랐음에도 다 나르지 못했다고 하니 그 호화로움을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무덤이 이 정도라면, 그의 생전의 생활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진시황은 다른 나라를 멸망시킬 때마다 그 나라의 궁전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다음, 수도함양에 재현하게 했기 때문에, 위수에 비친 궁전들의 그림자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는 위수 남안에도 대규모 궁궐 조성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그 일부가 유명한 아방궁이다. 아방궁은 동서 700m의 거대한 궁전으로 전상에 1만 명이 앉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역시 아방궁도 항우군에 의해 소실되었는데, 그때 궁실을 태운 불은 3개월간 꺼질 줄 몰랐다고 한다. 


진시황은 우주의 주재자인 상제가 하늘에서 군림하듯이, 천하 유일독존의 황제인 자신의 생활공간은 상제의 천상공간을 그대로 지상에 재현하는 위대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권력의 과시는 진의 몰락을 재촉했다. 백성들은 오랜 전란이 그치고 통일의 그날이 오면, 기쁜 노래를 부르며 농사에 전념하는 평화로운 시대가 오리라고 믿었을 터이나, 그러한 날은 오지 않았다. 


여산릉, 병마용 갱, 아방궁, 그리고 만리장성과 전국 도로의 건설, 게다가 변방의 수비에 동원되어야 했다. 그 엄청난 노역과 세금, 혹독한 법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엉망이었다. 


최근 발굴된 진의 법률에 의하면, 범죄자는 죄가 가벼울 경우에는 재물로써 속죄했지만, 무거울 경우는 국가의 노예, 다리의 절단, 효수 등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감옥은 넘쳐났고, 아방궁의 건설에만 70여만 명의 죄수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학자들의 추산에 의하면, 이들 각종 노역이나 병역에 차출된 성인 남자의 수는 약 3백만. 당시 인구를 약2천만명에 대략 400만 호로 잡는 다면, 1호당 1명은 동원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진시황에게도 죽음의 그늘은 찾아왔고, 그럴수록 그는 불로장생의 명약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애쓰는 등 생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보였다. 죽음을 생각하기도 싫었던 그는 후계자도 명확히 지목해 놓지 않았다. 


동방순행에 올랐던 그는 마침내 기원전 210년 5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죽음에 임박한 그는 변방에 나가 있던 장자 부소에게 위를 물리고자 했으나 환관 조고의 농간으로 어리석은 호해가 허수아비 황위에 오르게 되었다.



진시황이 죽은 이듬해 마침내 백성들의 원성은 폭발하기 시작했는데, 그대표적인 움직임이 최초의 농민란으로 불리는 진승, 오광의 난이다. 


진승과 오광은 옛 초나라의 땅이었던 하남성 남부의 가난한 농민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209년 7월, 북쪽 변방 수비의 명을 받고 어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여름 장마가 닥쳐 길이 막히니, 도저히 기일 안에 당도할 수 없는 지경에 달하게 되었다. 진의 엄한 법률은 어떠한 사정도 용납하지 않았고, 기일이 늦어지면 참수형에 처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뜻을 모은 두 사람이 농민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미 기한에 늦어버렸다. 어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형, 비록 사형을 면한다 하더라도, 변경의 수비를 맡는 다면 두 번 다시 고향 당을 밟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왕후 장상의 씨앗이 어찌 따로 있겠는가? 우리도 똑같은 인간이 아닌가?


농민들은 모두 함성을 지르며 이들을 따랐다. 진승의 예견대로 봉기의 소식에 접한 전국 각지의 백성들은 항쟁의 대열에 나섰다. 이미 백성들은 깃발만 오르면 반란에 동참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진승은 초나라의 수도였던 진을 함락,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장초라 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실전경험이 없는 농민들의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했고, 농민 주력군이 진의 장군 장감에게 패한 후에는 내부동요까지 일어나 진승, 오광이 살해되기에 이르렀다. 


사상 최초의 농민정권은 불과 6개월 만에 몰락했고, 봉기의 열매는 농민들의 손에 쥐어지지는 않았다.


어찌됐든 진나라는 진승, 오광의 난 이후 전국에 빗발치는 반란의 물결에 휩싸이고, 기원전 206년 그 최후를 맞이했다. 통일을 이룬지 불과 15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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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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