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잡/중국사 100장면'에 해당되는 글 96건

  1. 2021.02.03 중국사 100장면 - 31. 서역으로의 관문 돈황. 당삼채와 신라 사신(7세기~8세기)





중국사 100장면 - 31. 서역으로의 관문 돈황

당삼채와 신라 사신(7세기--8세기)





현장이나 혜초가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날 때, 고구려의 후예 고선지가 티베트 정벌을 나갈 때, 장안을 출발한 이들이 새로운 세계를 예감하는 첫 관문은 돈황이었다. 


이들에게 돈황은 비단길의 시발지였으며, 낙타에 짐을 가득 싣고 험난한 천산산맥을 넘어온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에게는 이제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는 비단길의 마지막 기착지였다.


현재 약 1만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감숙성 돈황현. 그 동남쪽 약 50리 지점에 명사산이 있고, 그 산 중턱에 4세기 중반부터 거의 1천년에 걸쳐 파인 석굴이 자그마치 492개가 발굴되었다. 휘황있는 이 석굴군은 비단길의 살아 있는 증인이다.


역시 당나라가 비단길의 최융성기였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당나라의 석굴사가 232개. 그중 당말의 한 석굴사에 오늘날의 돈황학을 탄생시킨 놀라운 보물창고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1900년경,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이 석굴사에 자칭 도사라는 왕원록이라는 이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동굴 안의 조그만 밀실을 발견했을 때, 그 안에는 고문서와 불경, 불화 등이 천장까지 가득 차 있었다.


왕 도사가 이 사실을 당국에 보고했으나, 적절한 조처가 없었다. 


1907년 헝가리 출신의 유태인으로 비단길 탐험을 위해 영국 국적을 갖고 있었던 슈타인은 그로부터 1만 점도 더 되는 고문서와 불화를 불과 말굽은 4장으로 구입했다. 


그 공적으로 슈타인은 영국 왕실로부터 경의 칭호를 수여받았고, 오늘날 이 유물들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게 되었다. 


다음해에는 프랑스의 펠리오가 와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포함한 5천여 점을 입수해 갔다. 


고문서들은 모두 10세기 이전의 것이었으니, 아마도 11세기 초, 누군가가 침략세력으로부터 이들은 보호하기 위해 서둘러 밀실을 봉했고, 궁극적으로는 사막의 건조한 기후가 이들은 세월의 침탈로부터 보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의 문화가 전후의 왕조에 비해 보다 개방적이고 국제적일 수 있었던 까닭은 당의 국력에 대한 자신감이라든가 지배층 내부의 진취적 성향 같은 요인과 함께 비단길을 통한 서역과의 빈번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나라에서는 외국인들도 문무의 관직을 얻어 활동하는 등, 외국인들은 상인에서 학자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기량을 발휘, 당문화의 발달에 기여했다.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네스토리우스교 등 외래종교도 유입되었다. 네스토리우스교, 즉 경교의 유행을 알려주는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가 명말에 발견되어 현재 섬서성 박물관 비림에 보관되어 있다.


당 전기의 황제, 귀족의 무덤에서는 당삼채라는 독특한 도용이 다량으로 발굴되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이국적이어서 주목을 끌고 있다.


당 황실의 능묘는 장안의 교외, 위하 북쪽의 구릉지대에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동서로 장장 150킬로미터. 이른바 '관중 18릉'으로 불린다. 


당대의 능묘는 한대 이래의 전통을 이어받은 분구석, 즉 지하 깊은 곳에 현실을 마련하고 지상에 거대한 사각 추대형의 분구를 쌓은 것과, 자연산의 중턱에 묘의 갱도를 뚫고 현궁을 구축한 형식이 있다. 


대체로 태종의 소릉부터 노동력과 재력이 다소 절약되는 후자의 방식이 채택되었는데, 이는 위진 시대부터 널리 이용되었던 방식이다.


거대한 고분의 마지막 시대를 장식하는 당의 능묘는 불행하게도 거의 도굴당했다. 그 대표적인 도굴자는 오재 시대 후량의 절도사였던 은도. 그는 능묘안의 금은보화를 탈취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거부가 되었는데, 그는 도굴의 기록까지를 남기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의 손에 걸려들지 않았던 유일한 무덤이 서쪽 끝에 있는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 건릉이다. 이 거대한 능묘가 발굴되는 날, 우리는 성당기의 훌륭한 벽화와 풍부한 문물을 고스란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971년, 건릉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황실, 귀족의 배총 중에 장희태자, 의덕태자, 영태공주의 3묘가 발굴되었다. 


영태공주의 묘에서는 도굴자의 시체가 벽에 기댄 채로 발굴되었는데, 분배의 몫에 눈이 어두웠던 그의 일행이 그를 배신, 그를 남겨둔 채 도굴갱을 닫아버렸던 모양이다. 발견되면 사형, 도굴범들은 신속하게 금은의 부장품만을 챙긴 채 무덤을 나왔다.


3묘가 모두 도굴당했지만,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묘지와 풍부한 벽화, 그리고 화려한 당삼채 도용은 남았다. 


당삼채란 여러 색깔을 입힌 연질 도기로, 녹색과 붉은색, 흰색의 3색인 경우가 많았고, 이상하게도 안사의 난 이전의 당 시기에만 나타났다가는 홀연히 사라졌기 때문에 당삼채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것은 무덤의 명기로만 만들어졌기 때문에 도굴범들의 손으로부터 남겨지게 되었다.


당삼채 그릇 중에는 페르시아의 금속기와 모양이나 디자인이 닮은 것이 많다. 삼채 도용에는 다양한 모습의 기사용이 많은데, 여자가 탄 모습도 눈에 뛴다. 


눈이 움푹하고 코가 높으며 턱수염을 기른 서역의 마부용도 있고, 아마도 당시에는 유행의 첨단을 걸었을 서역풍의 의상, 화장을 한 중국 귀부인의 모습도 보인다. 


<악사를 태운 낙타>가 걸작인데, 낙타의 등에는 장방형의 카페트가 낙타의 배를 가릴 정도로 덮여 있고, 그 위에 5명이 타고 있다. 그중 3인은 수염을 기른 어김없는 서역인인데, 4명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서 각기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이들은 아마도 장안 시내를 그런 모습으로 떠돌아다녔을 거리의 악사나 가수였을지 모른다.


장희태자 이현은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황태자였으나, 어머니 측천무후에 의하면, 그는 측천무후의 언니 한국부인과 고종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무후는 태자의 마굿간에서 수백 벌의 갑옷을 발견했다는 구실로 그를 폐출 시켰다. 


의적태자와 영태공주는 남매간 말년의 측천무후가 사랑하던 미소년 장씨 형제를 모함했다는 이유로 할머니 무후에게 주살되었다.


장희태자는 중종의 형이요, 의덕태자와 영태공주는 중종의 자녀다. 중종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들의 애달피 여겨 장중한 무덤을 조성했다. 


따라서 3묘의 벽화는 돈황 벽화가 불교적인 색채를 많이 띠는 데 발해, 일월성신도, 사신도 등 도교적인 주제가 강하다. 특히, 출행도, 의장도, 궁녀도, 타구도 등의 그림은 당나라 황실의 일상생활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장희태자 이현의 묘에 그려진 '예빈도'의 한 사절이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는 깃털 2개를 꽂은 모자를 썼으며, 하얀 도포에 흰 띠, 헐렁한 바지에 황색 구두를 신고 있다. 그의 옆에는 움푹한 눈에 높은 코, 커다란 털모를 쓴 다른 나라 사절들이 있다.


고구려의 풍속을 <구당서> 고려전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관직이 높은 사람은 청라로 관을 하고, 다음 직위는 비라로써 한다. 두 개의 깃털을 꼽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윗도리는 통소매이며, 바지는 폭이 넓고, 흰 가죽의 띠, 황색의 가죽신을 신는다.)


아울러 신라, 고구려, 백제의 풍속, 형법, 의복은 모두 같다고 했고, 이현의 장례 당시에는 이미 신라만이 있었으니, 이 사신은 아마 신라 사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전화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