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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2.30 중국사 100장면 - 19. 왕망의 이상적 토지개혁




중국사 100장면 - 19. 왕망의 이상적 토지개혁


한나라는 외척 왕망이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했던 신나라를 기점으로 전한과 후한으로 나뉜다. 이는 전한의 수도는 서쪽의 장안, 후한의 수도는 동쪽의 낙양이었기 때문에 서한과 동한으로 불리기도 한다.


왕망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환경속에서 유학에 전념했다. 적어도 젊은 날의 그는 유학에 심취한 열렬한 신봉자였으며, 이는 그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유교적 도덕의 실천에도 힘을 기울여 검소한 생활과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도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당시는 원제가 죽고 어린 성제가 죽의, 원제의 황후였던 왕황후 일족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왕씨의 위세를 날아가는 새도 떨어드릴 정도라고 일컫고 있었다. 


왕망은 왕황후 동생의 아들, 즉 조카였다. 일찍이 관계에 오른 그는 38세 이미 재상인 대사마의 지기에 올라 왕씨 일족을 대표하는 지위에 올랐다. 


어느 날 왕망의 어머니가 병에 들자 귀족들이 다투어 문병을 갔는데, 사람들은 왕망의 검소한 생활에 깜짝 놀랐다. 


마중나온 왕망의 부인의 의복이 너무도 초라하고 겨우 무릎을 가릴 정도로 짧아서 하녀로 착각될 지경이었던 것이다. 


한번은 왕망의 차남이 집안의 노예를 죽인 사건이 있었다. 당시는 노예를 죽이는 것은 그다지 중한 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망은 아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육친조차 용서하지 않는 그의 엄정한 태도는 부패가 만연한 당시 사회에서 사람들의 얘깃거리가 되었다.


성제, 애제가 거듭 요절하고 9살의 평제가 즉위했다. 왕망은 자신의 땅을 황후로 삼고 점차 실권을 장악해나갔다. 


마침내 평제를 살해하고 2살박이 선제의 현손 영을 황태자로 삼은 후 스스로 가황제가 되더니, 이윽고 참위설을 이용, 자신의 즉위가 하늘의 뜻이라는 여론을 조작, 진천자가 되었다. 이때가 기원후8년, 신나라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왕망의 꿈을 유교적 이상국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유교적 이상국가는 이미 주나라 때 실시되었던 것으로 믿어졌고, 모든 것을 주나라의 제도로 복귀시킴으로써 그 꿈은 가능한 것이었다. <주례>에 의거해 관제가 바뀌고, 관명, 지명 등이 변경되었다. 


그의 정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왕정제의 실시였다. 왕전제란 주의 정전제를 모범으로 삼아 모든 토지를 왕전으로 하여 매매를 금지하고 백성들에게 토지를 고르게 분배하는 것이다. 


정전제란 1정의 토지를 아홉으로 구분하여 그 여덟을 여덟 집에 주고, 하나를 공전으로서 공동으로 경작케 하여 이를 조세로 공출시킨 것이다. 아울러 사노비의 매매 또한 금지되었다.


이는 전한 중기 이후 점차 확대되어온 대토지 경영의 폐단에 정면으로 승부를 거는 것이었으며, 중국 최초의 토지 균분제, 혹은 국유제의 실시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상적인 개혁은 책상 위에서 관념적으로 추출한 복고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객관적 현실에서 힘을 얻기 어려웠으며, 관료들의 부패로 시행되기도 어려웠다. 마침내 호족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겨우 3년만에 폐지되었다. 


그는 또한 중화사상을 내세워 주변 제국의 왕들을 후려 격하시킴으로써 각국의 이반을 초래했다. 특히 한동안 잠잠하던 흉노를 격분시켜 북방에는 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왕망은 30만의 군대를 파견, 흉노 정벌을 감행함으로써 oqr성들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적미군과 녹림당으로 대표되는 농민반란이 전국을 휩쓸었다. 번숭을 우두머리로 한 북방의 농민군은 눈썹을 붉게 칠해 관군과 구별했기 때문에 적미군으로 불리었는데, 도가적 경향이 강한 비밀결사에 부리를 두고 있었다. 왕광, 왕봉이 이끄는 농민군은 호북성 녹림산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녹림당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막상 권력을  장악한 세력은 호족이었다. 하남 남양의 대표적인 호족인 유인, 유수 형제는 녹림군과 연합했다가 점차 지도권을 장악해나갔다. 이들은 일족 중 유현을 임시 황제로 세우고, 곤양의 싸움에서 왕망의 대군을 격파, 장안으로 향했다. 


왕망은 죄수를 풀어 군대를 충당, 이에 대응했으나, 군 내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성내의 시민들이 봉기군에 가세함으로써 위기를 맞았다.


최후의 순간에도 왕망은 

"하늘이 나에게 사명을 주었는데, 한나라의 군사가 나를 어찌하랴"


큰소리를 쳤으나, 불타는 궁전을 버리고 이리저리 피해다니다가 난병에세 살해당했다. 이때가 기원후 23년, 신나라는 불과 15년만에 역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 왕망은 음흉하고 위선적인 찬탈자로, 혹은 최초의 국가 사회주의자로 매우 상반되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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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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