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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1.05 중국사 100장면 - 22. 황제의 옆자리, 외척과 환관





중국사 100장면 - 22. 황제의 옆자리, 외척과 환관


궁궐은 국가 최고 권력기구인 황제의 공식적인 집무실이자 사적 생활의 공간이기도 하다. 황제가 평생토록 그의 모든 공사 생활을 영위하는 구중궁궐에는 황제와의 사적인 관계를 이용, 호시탐탐 대권을 노리는 세력이 있었다. 황후의 일족이 외척과 후궁을 돌보기 위해 설치된 환관이 바로 그들.


특히 후한은 중국사에서도 외척, 환관의 전횡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시기로, 이들의 세력다툼 속에서 황제는 그들의 꼭두각시 정도의 희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공교롭게도 후한의 황실에는 유전적인 요인이 있었던지, 광무제와 그 아들 명제만 각기 62세, 48세까지 살았을 뿐, 나머지 황제들은 극히 단명했다. 황제가 어려서 죽으면 그 뒤를 잇는 황자는 더욱 어리게 마련이었다.


4대 화제로 직계가 단절되고 방계에서 황위를 잇게 되니 황실의 위엄은 손상되고, 이때부터 외척, 환관의 정쟁이 시작되었다. 


화제가 열 살에 제위에 오르자, 그의 어머니 두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 그녀의 오빠 두헌 등 일족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장성한 화제는 외척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측근의 환관 정중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환관제도는 중국뿐 아니라, 우리 나라나 베트남, 혹은 고대 이집트나 페르시아, 그리이스, 동로마 등 여러 나라에서도 발견되는데, 철저히 전제군주에 봉사하기 위해 설치된 제도다. 


성불구자인 환관에게 후궁이 많은 궐내의 연락사무 등을 맡게 한 것인데, 처음에 환관은 궁형을 받은 죄인이나 이민족으로 충당되었으나, 점차 황제의 최측근이라는 특성 때문에 권력장악의 야망을 가진 자들 중에 거세를 자청하는 자도 생기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주대부터 왕조체제가 몰락하는 청말까지 존속했는데, 적을 때는 수천 명, 많을 때는 만명이 넘었다.


후한의 외척세력으로 가장 유명한 이는 양익이다. 그는 순제 황후의 오바로 순제 때 전권을 장악한 후 충제, 질제, 환제까지 4대에 걸쳐 정치를 전횡했다. 환제는 양익의 누이인 황후가 죽자 다시 환관의 힘을 빌어 양씨 일족을 주살했다. 


이때 환제는 환관 단초 등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단초의 팔을 깨물어 흘러나오 피로 선서를 하는 결의를 보이기까지 했다.


이후 후한 최대의 환관 전횡기가 도래했다. 환관은 일족이나 양자를 관리로 중용하고 관료나 호족과 결탁, 중앙이나 지방의 관계에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정권을 독점했다. 


그들은 뇌물을 받고 부정한 선거로 관리를 등용하고, 백성들에게는 혹독한 가렴주구로 일관하여 호화방탕한 생활을 일삼게 되니, 부정과 부패가 사회에 만연했다. 


한편 후한 대의 지방 유력자들인 호족 중에는 시류에 편승하여 외척이나 환관가 결탁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유교적 논리로 무장, 명예와 정절을 중시하면서, 부정부패의 척결을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청류라 부르고, 환관 일파를 탁류라고 지칭했다. 태학의 학생이거나 관리, 또는 재야 지식인이었던 이들은 세간에 광범한 여론을 조성하고, 중앙이나 지방의 관리를 품평하여 청절한 관료를 선정, 이들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환관 일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후한에 이르면 유교가 뿌리는 내려 낙양의 태학 학생은 3만 명에 달했고, 태학의 건물도 여러 번 증축되어 말기에는 24동, 1,850교실의 대건물이 되었다. 


지방에서도 각각 사숙이 만들어져 이름있는 학자를 스승으로 하는 동문의 학생들이 배출되었다. 유교적 의식에 고취되고 정상적인 관리 등용문이 가로막힌 이들은 반환관 운동에 앞장섰다.


환관파와 반환관파인 대립은 '당고의 금'으로 불리는 2차례의 대탄압으로 청류 지식인들이 관계에서 일소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환관 일파의 완승으로 끝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지방에 세력을 갖고 있는 청류 지식인들은 재야의 잠재세력으로 광범하게 뿌리를 내려,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귀족층으로 성장해나갔다.


166년의 1차 당고에서는 청류파 관료의 대표격인 사예교위(경찰총장) 이응을 비롯한 2백여 명의 관료와 지식인들이 투옥되었다. 


이응은 환관의 비리를 엄중이 다스리던 중, 악행을 거듭하던 환관 장양의 아우 장삭을 추적, 형의 저택에  피신하여 기둥 속에 숨은 그를 끝내 기둥을 부수고 체포함으로써 환관들에게 쇼크를 주었다. 


이응 등의 죄목은 (태학의 학생과 각 군의 생도들과 왕래하면서 당을 만들어 정부를 비방하고 사회의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는 명목이었다. 이들은 이듬해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종신 금고형, 즉 관직추방과 영원한 관리등용 금지의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어 169년의 2차 당고에서는 당인 100명이 사형을, 그 외 600명이 유형이나 금고에 처해지는 등 대숙청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당인을 은닉했다고 의심이 가는 집에까지 처형의 손길이 뻗쳤다.


한편, 농민들은 부패한 정권과 잇따른 정쟁 속에서 서서히 몰락해갔다. 호족과 부패한 관료세력에 의한 토지겸병은 날로 심각해졌으며, 메뚜기 떼와 홍수, 가뭄등으로 인한 거듭된 대기근은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사서>는 '쌀값은 치솟고 사람이 서로 잡아먹으며 노약자는 길에 버려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좌절과 실의에 빠진 농민들 사이에서 태평도, 오두미도, 등의 도교적 신흥종교가 유행병처럼 번져갔다. 태평도는 부적을 살라서 물에 타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하여, 절망적 가난 속에서 질병의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두미도는 곡물 다섯 말을 바치면 된다고 했다. 뒷날 도교의 뿌리가 된 장각의 태평도는 하북성 거록에서 일어난 지 불과 10여년 만에 화북 동부에서 양자강에 걸쳐 수십만의 신자를 얻었다.


184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은 이 태평도의 각 지부가 군사조직으로 전환되어 일어난 대규모 농민봉기다 중국의 전통적 오행설에 의하면 불에서 흙이 생성된다. 


이들은 화덕에 해당하는 한나라는 곧 몰락하고 이어서 토덕에 해당하는 황건의 세상이 다가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머리에 새세상을 상징하는 황색의 띠를 동여매었다. 


치밀한 사전계획에 의해 한꺼번에 36만이 봉기한 이 전대미문의 항쟁은 들불처럼 광대한 지역에 번져나갔다. 


황건군은 그해 가을, 장각이 죽고, 동생 장량, 장보 또한 전사하는 등 유능한 지도자를 잃고 주력군이 쇠미해졌으나, 각지에서 약 30년간 끈질긴 항쟁을 벌였다.


대규모 농민봉기에 봉착한 지배층은 즉시 권력투쟁을 중지하고 당고를 해제하는 등 호족세력을 무마하여 항쟁의 진압에 안간힘을 썼으나, 유명무실한 명목만의 왕조체제를 유지할 뿐이었다. 


마침내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가 한의 왕위를 찬탈, 위나라를 세우니, 이로써 광무제로부터 196년 고조로부터 422년간 존속했던 고대제국 한나라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새로이 펼쳐지는 세상에서는 진, 한과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고대제국은 다시 출현하지 못했다. 더구나 농민들이 꿈꾸었던 새세상도 쉽게 열리는 것은 아니었다. 


황건난의 진압과정에서 실력을 자각한 호족세력들의 시대가 당분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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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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