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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1.13 중국사 100장면 - 25. 도교와 불교의 융성, 도교의 성립(444년경)




중국사 100장면 - 25. 도교와 불교의 융성 

도교의 성립(444년경)




절이나 탑 등 도처에 산재해 있는 불교적 건축물들은 마치 중국의 산천이 처음 생성될 때 그때부터 함께 있어왔던 것처럼 중국적 풍광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어서 불교가 중국문화와는 대조적일이만큼 이질적인 이국 종교였다는 것을 기억해내는 것이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그러나 불교는 신유학의 서단을 열었던 당대의 거유 한유가 비판했던 것처럼, 인도에서 발생한 이적의 종교로서 중국적 관습과는 대립되는 요소가 많았다. 


승려의 독신주의와 고행으로 육체를 괴롭히는 수도생활은 대를 이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중국적 가족제도, 조상으로부터 받은 신체를 온전히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국적 전통 사고방식을 뿌리째 흔드는 것이었다.


공자는 일찍이 죽은에 대해서 묻는 제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살아가는 것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은 후의 것을 알겟는가?"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구원의 문제를 중요시하는 어떠한 종교도 무지한 대중을 현혹시키는 비합리적인 미신에 불과하다.


이러한 불교가 위진남북조 시대에 중국인들을 열광시키고 중국인의 정신세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시기 화북에 왕조를 세웠던 유목민족들에게 중국적 편견이 없었던 점, 또한 거듭되는 전란과 정치적 분열 속에서 이미 제국의 학문으로 뿌리를 내린 유교가 힘을 잃고 사상적 공백을 보이고 있었던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계층 상하에 관계없이 종교의 세계에 침잠하여 정신적 안정을 구하고자 하는 경향이 널리 퍼졌다. 이국 종교인 불교뿐만 아니라 중국 전통의 도가사상도 다시 부각되어 중국사상의 약진은 앞서의 춘추전국시대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제국이 붕괴하고 가닥이 잡힐 것 같지 않은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자, 지식인들은 사회로부터 시선을 서서히 거두어 자신의 내면 세계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유교적 교양을 갖춰 관료가 되는 길은 이미 차단되어 있었고, 어지러운 세상은 절망과 인생에 대한 허무감을 안겨주었다. 경제적 여유 집단인 이들은 세속을 떠난 개인적 완성이나 구원의 문제에 빠져들었고 자연스레 도가의 사상이 다시 부상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죽림 7현이라고 불리는 은둔자 집단의 청담사상이다. 청담이란 '더러운 세속을 초탈한 맑은 이야기' 정도의 의미로, 이들은 세상일을 등지고 자연에 묻혀 살면서 자신의 감정을 시나 칠현금, 술을 빌어 표현하기도 하고, 기이한 충동적 행적을 일삼이면서 사회적, 정치적 환멸에 응답했다.


종교로서의 도교는 엄밀하게 말하면 본래의 도가 사상과는 거리가 있다. 도교는 오늘날까지도 유달리 건강에 관심이 많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염원되었던 질병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즉 불로장새의 염원이 담긴 신선사상을 중심으로, 음양오행설, 참위설, 혹은 민간의 잡다한 신앙들이 뒤섞인 것이다.


진시황 이래 도교에 심취해서 불교 대탄압을  단행했던 당 무종에 이르기까지 불로장생을 구하는 황제들의 행렬은 그치지 않았으며, 이들 중에는 연금술로 만들어진 중금속을 불로장생약으로 잘못 믿어 하늘이 내린 명까지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시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금술에 대한 관심은 4세기 초, 이분야의 기념비적인 저작인 <포박자>를 출현시켰고, 민간에서는 불로장생을 가져온다고 믿어졌던 호흡 조절법과 술과 고기등을 피하는 섭생법이 널리 유행했다.


도교의 성립시기를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교단조직 등 최초의 조직화된 움직임은 후한 말 황건적의 난의 모체가 되었던 장릉, 장로의 오두미도와 장각의 태평도를 들 수 있다. 


그후 여러 파로 나뉘어져 통일적인 교리나 조직을 갖추지 못하고 있던 도교가 민간종교로 완성되는 과정에서 고등종교인 불교가 미친 영향은 매우 큰 것으로 보인다. 


도교의 승려인 도사가 보통 결혼이 허용되는 것은 불교와 다르지만, 도교의 경전(도장)이나 사원(도관) 제도는 불교의 경전이나 사원 제도를 많이 닮아 있다. 실제로 민간에 이르면, 도교와 불교는 신화와 미신, 주술 등이 뒤섞여 구별이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한편, 북위 태무제는 유교가 이적시하는 유목민족의 중국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444년 새로이 도교를 국교로 삼았다. 이때 오두미 계열의 도사였던 구겸지에 의해 도교의 세력이 정비되었다. 대체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도교가 민간종교로서 완성되었다고 본다.


전승에 의하면, 불교는 64년 후한 명제의 꿈에 현몽함으로써 중국에 처음 전래되었다고 한다. 이를 말 그대로 믿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이 시기에 상인, 혹은 승려들에 의해 전래되었다고 보인다. 


가장 위대한 전래자는 구마라습이다. 그는 인도인을 아버지로 하여 중앙 아시아에서 태어났으며, 382년경 중국인 원정대에 포로로 잡혀 중국에 끌려온 후 방대한 역경사업을 이끌었다.


불교는 외래문화에 대한 편견이 적은 북조 상류층에서 널리 성행하기 시작했다. 5호 시대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북위 왕조에서 만개하게 되었는데, 그 상징물이 바로 돈황 막고굴과 함께 3대 석굴로 꼽히는 운강, 용문의 석굴사원이다.


석굴 조성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는 황제였으며, 운강석굴은 북위 최초의 수도였던 산서성 대동, 용문석굴은 두 번째 수도였던 낙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운강석굴사원을 예로 들면, 사암층의 단애를 따라 약 40개의 동굴이 약 1킬로미터에 걸쳐 장대하게 조성되어 있는에, 조각된 불상이 대소 합해서 자그만치 5만개 이상이 된다. 


그중 제16굴부터 20굴, 이른바, '담요 5굴'에 있는 위풍당당한 5불은 당대의 황제인 문성제와 그의 선조인 다섯 황제를 상징한 것으로, '제왕이 곧 여래'라는 지배이념의 표현이다. 


이제 불교는 황제권과 손잡고 국가 불교로 정착하면서 폐불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며, 황제는 불력의 힘을 벌어 스스로 부처로 군림함으로써 자신의 세속적인 지배를 정당화 하고자 했다. 이를 주도한 승려가 담요였다.


이후의 불상에 새겨진 명문에서 '황제폐하를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라는 글자를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불교를 이용해 황실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하려는 북위황제의 의도는 훌륭히 달성되었다고 보이며, 이러한 현상은 중국을 통해 불교를 전해 받은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에서도 나타났다.


국가 불교로 재해석된 불교의 윤회설을 현실에 적용하면, 민중들의 고난에 찬 삶은 지배층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생에서의 자신의 잘못된 행위(업)의 결과, 즉 인과응보이므로 누구를 탓할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민중의 저항은 부당한 것이 되고, 현실에서의 불평등한 사회질서는 정당화되는 것이다.


500년부터 23년간 조성된 거대한 용문석굴사원의 조성에는 80만의 인력이 동원되었다.


불교가 널리 성행함에 따라 진리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인도 순례를 감행하는 구법승이 줄을 이었다. 8세기까지의 약 200명의 승려 명단이 알려져 있다. 그중에 9명이 우리 나라의 승여로 확인 되었는데, 혜초가 처음에는 중국의 승려로 알려졌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좀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로는 5세기 초의 법현, 7세기 전반의 현장, 7세기 후반의 의정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여행기를 남겨 정확한 연대기적인 기록이 적은 인도의 역사를 밝히는 데 뜻밖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현장은 우리가 <서유기>에서 만나는 삼장법사(본래의 뜻은 경전 번역가)의 모델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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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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