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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1.09 중국사 100장면 - 24. 민족 대이동과 강남 개발, 5호의 침입과 동진의 성립(317년)





중국사 100장면 - 24. 민족 대이동과 강남 개발

5호의 침입과 동진의 성립(317년)




사마염이 위나라의 제위를 빼앗아 진나라를 세운 후, 삼국으로 분열되었던 중국은 잠시 통일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 통일은 불과 4대 37년간에 불과했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었으며, 중국의 분열은 당분간 지속될 형편에 있었다.


220년 한나라가 몰락한 이후부터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는 589년까지의 대분열기를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부른다.


위는 삼국 중 강성했던 조조의 나라 이름을 딴 것이고, 진은 통일 왕조인 서진과 유목민족에게 북중국을 빼앗기고 강남에 수립한 이른바 동진을 합친 사마씨의 정권을 일컫는다.


이후의 중국은 북중국에서는 유목민족의 정권들이, 남중국에서는 한족의 정권들이 각기 변천을 거듭했다. 이를 통틀어 남북조라고 부른다. 


화북은 여러 유목민족이 난립했던 5호 16국을 선비족의 북위가 통일했다가, 서위와 동위, 이어서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계승되었다. 강남에서는 동진 이후,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왕조가 이어졌다. 


흔히 부르는 6조라는 별칭은 여기에 삼국의 오를 포함한 것으로 강남에 세워졌던 여섯 왕조를 가리킨다.


마치 서양에서의 게르만의 대이동처럼 유목민족들은 한의 몰락은 전후하여 중원을 점령, 중국사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로마가 라티품디움의 성행으로 인한 자영농민의 몰락으로 제국의 쇠퇴를 보이다가 마침내 게르만 족의 대이동으로 몰락을 맞는것과 유사한 현상이 중국의 고대제국 한나라에서도 나타났다.



이미 한나라 말기부터 사실상 중앙정부를 지배했던 지방호족들은 황건의 대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사적으로 더욱 강력해졌다. 


이들의 위치는 위진남북조 시기의 끊임없는 왕조 변천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황실을 능가했기에 우리는 이시기에 비로소 귀족사회가 성립되었다고 말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겨우 13세의 나이에 희생되었던 송의 순제는 '다시 태어난다면 황실 이외의 집에서...'  라고 탄식했다.


송조 8대의 황제 중에서 암살을 모면한 자는 불과 3인 뿐이었으며, 48년간의 안정된 통치를 했던 양무제도 종국에는 후경의 난으로 유폐되어 굶어죽었다.


한편, 귀족들에게 집중된 엄청난 부는 찬란한 귀족문화를 꽃피웠으나, 그들의 사치스런 생활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사마염때의 공신인 하증은 매일 1만 전의 비용을 들인 식사를 하면서도 아직도 부족사다고 했는데, 그의 아들 하소는 급기야 2만 전으로 정했다.


혜제는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간다는 보고를 받고서 말했다.

'밥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좋을 텐데...'


게다가 서진의 귀족들은 60일간에 전사자가 10만을 기록한 경이로운 골육상잔, 즉 8왕의 난을 겪으면서 민첩한 북방 유목민족의 무장병력을 끌어들임으로써 스스로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이 되었다.


극도로 궁핍해진 화북의 농경민들의 행렬이 남으로 남으로 이어져서 양자강 유역 특히 호북, 사천 두 성 일대는 이러한 '난민'으로 들끓게 되었으며, 이들이 떠난 화북의 자리는 북방의 유목민족들로 채워졌다. 


유목민족들의 중국 내지 이주는 이미 한말부터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들의 생활은 사회의 최하층, 즉 호족의 노예적 예농 혹은 소모품적 병사가 고작이었다.


304년 8왕의 난 때 두각을 나타냈던 흉노인 용병대장 유연의 독립 선언으로 시작한 유목민족들의 저항이 5호 16국 시대를 개막했다. 


5호란 흉노와 흉노의 별종인 갈족, 동복방에서 온 몽고계의 선비족(돌궐족 설), 서방에서 온 티베트 계의 전진은 우리 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나라로 특히 전진왕 부견은 5호의 가장 위대한 군주로 꼽힌다.


놀라운 것은 유목민족이 한족을 지배했던 이 최초의 시기에서조차 한족의 문하는 보호, 육성되어 다음 시대에 계승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서양에서 게르만의 이동 이후 로마의 문화가 거의 단절되었던 것과 비교해볼 때 중국문화의 저력을 새삼 깨닫게 하는 것이다.


439년 북중국을 통일, 중국내에 최초로 안정된 유목민족의 왕조를 건설했던 북위는 한족의 지배를 위해 중국의 효율적인 지배체제와 문화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본격적으로 실시한 가람이 효문제이다.


할머니 풍태후로부터 유가적 교양을 주입받았던 효문제는 도읍을 북방의 평성(산서성 대동시)으로부터 중원의 낙양으로 옮기면서 농경사회에 바탕을 둔 이른바 한화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선비족 고유의 부족사회와 문화의 고수를 주장하는 반란세력을 진압하면서 이들에 의해 추대되었던 자신의 아들 황태자 순까지도 처형했다. 


그는 스스로 부족명에서 전용된 성 '탁발'을 '원'이라는 한족풍의 성으로 바꾸었으며, 선비복의 전통적 풍속, 언어까지 폐지시켰다. 본관을 낙양으로 옮기고, 죽은 후에도 북방 들판으로 돌아가 매장하는 것을 금지했다.


한편, 이들 유목민족에 의해 중국의 문화가 보존되었다는 사실만을 주목한다면 이 시기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했다고 볼 수 없다. 일찍이 황하문며의 발생 이래 중국의 문화가 이때처럼 이질적인 문화의 커다란 충격을 받은 시기는 없었다. 


유교라든가 하는 중국적 편견에 오염되지 않은, 보다 진취적이고 소박한 유목민족의 문화는 중국문화를 새로운 활력으로 가득 차게 했으며, 수, 당의 보다 개방적이고 풍요로운 문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경제적 후진지역이었던 강남(양자강 유역)지역이 화북의 혼란을 피하여 대거 남하한 한족에 의해 대부분 개발, 농업생산력이 크게 향상되면서 새로운 경제적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급격히 늘어난 노동력을 이용, 둑을 쌓는 등 대규모의 수리공사를 일으킴으로써 새로운 농토를 확대했다. 벼농사가 부적당한 땅에는 보리 농사가 크게 장려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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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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