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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2.11 중국사 100장면 - 8. 철기의 확산과 군사기술의 변혁




중국사 100장면 - 8. 철기의 확산과 군사기술의 변혁



전국시대는 중국사회에서 커다란 격동기였다. 이제 신석기 말기 이래의 도시국가 체제는 마감되어가고, 거대한 고대제국의 출현이 예고되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철기의 발명으로 대변되는 기술상의 대혁신이 있었다.


철기는 지배계급의 상징물에 불과했던 청동기와는 달리, 사회 전반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청동기 시대에도 생산용구는 석기와 목기였으며, 그에 따라 생산력 수준도 신석기 시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은주 시대의 고도의 청동문명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부가 집중된 결과였다.


그러나, 점차 금속 제작기술이 발달, 춘추 중기에 이르면 보다 단단한 철기가 발명되고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철기는 보다 예리한 무기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농기구로 널리 사용됨으로써 정치, 군사, 경제, 사회 전반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했다.


철제 농기구는 땅을 보다 깊이 갈 수 있게 했으며, 여기에 소를 경작에 이용하는 우경이 시작, 인간의 근력에만 의존하던 농경은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다. 이를 제 2의 농업혁명이라 부른다. 


이제 기계화 이전 전통 농업사회의 기본틀이 마련된 셈이었다. 예전에는 쓸모없던 땅에 불과했던 황무지가 개간되고, 단위면적당 생산량도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또한 각국은 다투어 대규모 수리사업을 벌이게 되니 농지는 더욱 확대되었다. 


농업기술의 진전에 따라 집단농경에 의존하던 농업경영 방식은 소가족 단위의 생산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점차 사회조직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새로운 물결을 재빨리 인식하고 개혁을 가속화시킬 수 있는 나라가 장차 통일제국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주산업인 농업생산의 발달로 경제 전반에 생기가 넘쳤다. 수공업, 상업등이 농업에서 분리, 독자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특히 제철업, 제염업의 발달이 돋보였다. 제철업은 각종 농구와 무기의 수요 폭증에 따라 눈부신 발전을 보였다. 



제나라의 수도 임치에서 발굴된 야금유적지는 넓이가 십여 만 평 방미터에 달했으며, 곳곳에서 발굴된 주조장에서는 철제 농기구가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사람들은 이때 이미 산 위에서 적갈색 흙이 발견되면 그 아래에 철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으며, 당시 철이 출토된 산이 3,609개 소였다는 기록이 있다. 


각국의 산물이 활발히 교환되어 원격지 무역을 통해 재부를 축적한 대상인들이 출현했는데, 진나라의 여불위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화폐는 이미 춘추시대에 출현했으나, 전국시대에 널리 보급, 농기구 모양의 포전, 칼 모양의 도전이 널리 사용되었다.


산업발달의 거대한 흐름은 또 다른 면에서 각국 국경의 철폐를 요구하고 있었다. 각국의 화폐, 도량형 등의 차이는 상업의 발달에 제약이 되고 있었으며, 국경을 넘어 한 줄기로 흐르는 강물에 대한 대규모 수리사업이 요청되고 있었다.


각국의 왕들은 각기 부국강병에 힘써 스스로 통일의 주인공임을 자임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군사력의 우열로 판가름날 성질의 것이었다. 따라서 전국시대에는 군사상으로도 커다란 변화가 뒤따랐다. 


전국시대의 전쟁에 비하면, 춘추시대의 전쟁은 거의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춘추시대의 전쟁이란 청동제 칼과 창으로 무장한 귀족들이 4,5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싸우는 차전이었으며 귀족전이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이르면, 춘추말기 강남의 오, 월에서 시작된 평민병사의 보병전이 중심이 되었다. 


보병부대는 산림과 소택지에도 자유로이 신출귀몰했으며, 쇠뇌라는 발사용구가 발명되면서 사정거리가 길어져 수레 위에서의 사격전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다. 북방의 조나라에서는 유목민족의 기마전술을 채용하기도 했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한번의 싸움으로 승패가 판가름나고, 수도 바위에 치중하는 야전이었지만, 전국시대에는 주요 도시 및 변경에 이르기까지 성을 거점으로 끈질긴 공방전이 벌어졌다. 


춘추시대의 초강대국 진, 초의 싸움에서는 전차 4천 승, 즉 많아도 4만 정도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나, 전국시대의 각국은 60만 ~ 100만의 대군이 동원되었다.


이제 전쟁은 귀족들의 영예가 아니라, 국민개병제에 의해 평민 모두가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되었다. 전리품의 획득과 상대국의 복속에 목적을 두었던 전쟁은 토지의 획득과 적국 병력의 말살로 바뀌었다. 


순수 무장이 출현하게 되었으며, 전쟁의 이론과 작전을 연구하는 병법이 발전, 유명한 손자병법이 출현하기도 했다. 


사력을 다한 각국의 경쟁 속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 백성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위협속에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묵자의 반전론이 백성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받았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묵가가 가장 인기있는 학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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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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