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잡/중국사 100장면'에 해당되는 글 96건

  1. 2020.12.02 중국사 100장면 - 2. 황하, 중국문명의 원천





중국사 100장면 - 2. 황하, 중국문명의 원천




만일 현대인이 타임 머신을 타고 과거로 떠난다면, 아마도 그 생존의 상한선은 신석기 시대에서 멈추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전, 지구상에는 오랜 빙하기가 끝나고 현재와 대차없는 지형과 기후가 만들어졌다. 인류는 수백 년간 인류를 지배했던 '깨뜨리는 문화'에서 탈피, '가는 문화'로의 기술상의 대혁신을 이룩했고, 자연현상의 배후에 있는 원리를 깨달은 만큼 성숙한  정신력을 갖게 되었다.


신석기 시대에 인류는 야생하는 동, 식물을 사냥, 채집하는 일에만 의존하지 않고, 전혀 새로운 생활방식을 터득했는데, 그것은 농경, 목축의 시작이다. 이는 산업혁명에 견줄 만큼 인류 역사상의 대 사건으로, 우리는 이를 신석기 혁명, 혹은 농업혁명이라고 부른다. 


이제 인류를 비로소 스스로 필요한 작물을 생산하고 조정하는 생산경제에 돌입, 문명의 기로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오랜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한 곳에 정착, 인공의 '집'을 만들어 생활하게 되었으며, 바늘을 발명하고 결박의 기술을 터득, 걸치는 옷이 아니라, '꿰매어 만든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했다. 마을이 이루어지고, 마을사람들의 공동의 의식과 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약 6천 개소의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그 이른 시기의 유적은 기원전 7천년경까지 소급된다. 그 최초의 터전은 황화. 중국 북부에 널리 발달한 부드럽고 비옥한 황토 퇴적층과 거대한 황하의 물줄기를 탯줄로 중국인들의 새로운 생활 곧 원시농경이 시작되었다. 


오늘날은 남부의 양자강 유역이 최대의 농작물 지대로 알려져 있지만, 문병발생 초기의 생산기술로는 도처에 가득한 늪과 습지, 삼림을 개간할 수는 없었다.



중국의 신석기를 대표하는 앙소문화는 첫 발굴지인 하남성 승지현 앙소촌의 지명을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 1921년 역시 앤더슨에 의해 처음 발굴되었다 대체로 기원전 5000년경부터 기원전 2500년까지 존속, 뒤의 용산문화에, 계승되었다.


앙소인들은 현 중국인의 조산으로 확인되었다. 앙소인의 골격은 모두 몽고인종에 속하며, 현재의 화북 및 중앙아시아계보다는 남중국인계와 더 유사하다. 화북인은 이후의 역사 전개과정에서 북방민족과의 융합이 빈번해 체질사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유적은 섬서성 서안시의 반파 유적으로, 1953년 서안에서 발전소를 건설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현재 유적 자체가 반파 박물관으로 조성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는데, 중국에서는 유적 자체를 박물관으로 개방하는 예가 적지 않다. 


앙소기의 마을은 대개 강가의 약간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의 규모는 약 20채에서 100채 정도. 집은 땅을 약간 파고 짚이나 이엉으로 엮은 원추형 지붕을 얹었다. 


크기는 대략 직경 5m로 5명 내외의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면적이다. 집안의 중앙에는 화로를 두어 난로나 조명의 역할을 하게 했고, 집 부근에는 저장굴을 두어 곡물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오랜 경험으로 야생곡물의 생장이치를 깨닫고 농경을 시작한 이들이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풍부한 산물을 안겨주었을 리는 없다. 


초기의 원시농경은 여성들에 의해 전담되었다. 신체적인 조건상 임신, 육아를 담당해야 했던 여성들은 집 근처에서 간 돌도끼, 돌호미 등으로 수수, 조, 배추 등의 농사를 지었고, 수확물은 갈아서 토기로 된 시루에 가는 등 요리를 했다.


사람들은 멀리 나가 말, 사슴, 들소 등을 사냥했으며, 낚시와 어망으로 물고기를 잡았다. 우리를 쳐서 개, 돼지, 소, 양 등의 가축도 기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남녀간의 분업은 있었으나, 아직 남녀의 차별은 없었으며, 빈부의 차나 그로 인한 사람간의 차별도 없었다.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는 있었을지언정,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살아서는 그만그만한 크기의 집에서 살았으며, 죽어서도 함께 씨족 공동묘지에 묻혔다. 죽은 이의 발 밑에 몇 개의 토기를 껴묻어,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는데, 씨족장이라 할지라도 널빤지를 댄다거나 약간의 비취를 장식하여 그의 생전에 노고에 대한 감사를 표했을 뿐 보통사람들과 별다른 것은 없었다.


이들은 마을 중앙에 있는 커다란 집에서 마을 공동의 일을 함께 논의하고 결정했으며, 공동으로 생산하고, 그 산물은 평등하게 나누어 가졌다. 이들의 관계는 서로 평등했다.


그렇다고 대자연 속에서의 신석기인들의 평등한 공동체적 삶을 낭만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마을 주위에는 5~8m의 도랑을 파서 맹수들의 침입을 방어했으나, 아직 인간은 맹수로부터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인간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으며, 유아의 사망률은 더욱 높았다. 앙소인들은 유아가 죽었을 때 멀리 공동묘지에 내다묻지 않고, 질그릇에 넣어 집 부근에 매장함으로써 아이의 죽음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표현했다. 


인류가 굶주림에서 해방, 자연의 정복자로 등장하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문제가 극복되는 순간, 인간 사이의 억압과 지배의 새로운 관계도 시작될 것이다. 어찌됐든 신석기인들은 그 서단을 열었고, 신석기를 대표하는 정착, 농경의 상징물은 바로 토기다.


토기는 요리에도 응용되었지만, 본래는 저장을 위한 용기다. 토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류가 잉여생산물을 낳을 수 있는 생산력 단계에 도달했음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오랜 관찰을 통해 진흙을 햇볕에 말리면 매우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태양열보다 더 강한 불에 굽는다면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앙소의 채색토기는 붉은색, 검은색, 흰색 등의 반탕에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있다. 별, 파고, 사선 무늬 등 기하학적 무늬도 있고, 물고기, 뱀, 새 등 동물 무늬도 많다. 그중에는 사람의 얼굴을 한 물고기도 있고, 초기 글자 같은 부호도 보인다.


신석기인들의 이러한 감각은 사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내는 데 치중했던 구석기인들과 구별되는 것으로, 사물의 배후원리를 찾아내고 추상화하는 데 치중하는 신석기인들의 정신세계의 확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전화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