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41 신법당과 구법당 

왕안석의 개혁(1069~1074년)

 

'돌아보건대, 안으로는 사직의 일을 근심하지 않을 수 없고, 밖으로는 곧 이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하의 재력은 날로 곤궁해지고 풍속 또한 날로 쇠미해집니다...'

 

이 글은 1060년, 왕안석이 인종에게 바친 <만언서>의 서두이다. 그는 22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16년간의 지방관 생활을 통해 피부로 절갑했던 당시의 위기상황을 당송팔대가의 명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송왕조는 건국 후 100년이 경과한 인종 무렵, 대내외의 여러 문제들이 표출, 심각한 상황에 봉착하고 있었다.


거란과는 전연의 맹 이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새로이 서북방에서 티베트 계의 탕구트 족이 강성, 다시 중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들의 본거지는 황하 상류 오르도스 지방. 그들은 당말 황소의 난 진압에 협조한 후 중국으로부터 이씨 성을 받고 복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원호라는 뛰어난 인물이 등장하더니, 1038년에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하라 했다.

 

중국인들에게는 서하라 불리었던 이들은 독자적 문자를 제정하고 가공할 군사력으로 중국을 침공,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7년간의 전쟁을 마치고 1044년에 맺어진 양국의 화의에서, 서하는 송에게 신하의 예를 다시 취한다는 명분을 주면서, 해마다 비단 13만필, 은 5만냥, 차 2만근의 세폐를 받는 실리를 택했다. 송은 화의를 주선해준 요나라에게 다시 비단 10만 필, 은 10만 냥의 세페를 추가하기로 했다.


유목민족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인한 군사비의 증강, 여기에 송의 군사제도의 모순이 겹쳐 군사비는 엄청나게 증액되고 있었다.

 

태조 때 37만이었던 군대는 인종 때에 이르면 125만에 달했고, 군사비는 정부예산의 8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의 군대는 수적으로 비대했을 뿐 질적 수준을 매우 낮은 것이었다.

 

군대는 다분히 실업자 구제의 의미를 띠게 되어 흉녀닝 들면 재민을 구재하기 위한 모병이 이루어지곤 했으며, 제대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노병이 많았다.


권력분산 정책과 3년마다 치러지는 과거로 인해 관료의 수는 급증했다. 게다가 진종의 봉선의식 등 황실의 경비 또한 격증했다.


이른바 3용, 용병, 용관, 황실의 용비는 송의 국가재정 지출을 크게 확대했으나, 대지주관료들의 토지확장으로 농민들의 유망은 격심해져서 재정수입은 크게 감소하고 있었다. 마침내 송의 재정은 적자로 반전되기에 이르렀다.


1067년 19세의 청년 신종이 즉위되게 되면서 전면적인 대개혁이 시도되었다. 일찍이 왕안석의 정견에 깊이 공감하고 있던 신종은 1069년 왕안석을 전격 기용했고, 왕안석은 신종의 전적인 신뢰 속에 잇따라 과감한 신법을 발표, 송의 국력은 다시 회복되는 듯이 보였다.


신법은 농촌정책으로서의 청묘, 모역법, 상업정책으로서의 균수, 시역법, 병제개혁으로서의 보각, 보마법, 그리고 농전수리법, 방전 균세법 등으로 이를 통해 대지주, 대상인의 횡포로부터 중소농민, 중소상인들을 보호 육성, 부국강병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청묘법과 시역법은 각기 가난한 농민과 상인들에게 2할의 저리 융자를 주어 당시 10할을 초과하던 고리대금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보갑법은 농민을 10가, 50가, 500가 단위로 편제, 치안유지 조직으로 삼은 것인데, 농한기에 군사교련을 실시, 병농일치의 민병조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군사력을 강화하고 양병비를 절감하려는 것이었다.

 

농전수리법은 수리시설의 신설이나 보수 때 그 비용을 주민이 공동으로 부담하거나 정부가 대부해주어 지주가 독점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특히 논란이 되었던 모역법은 양세법 체제에서 화폐화되지 않고 남아 농민들을 괴롭혔던 노역을 화폐화하여 그로 인한 몰락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즉, 노역을 제공하던 민들에게 등급을 매겨서 화폐를 징수하고, 면역의 특권을 받던 관호로부터도 농촌의 반액인 조역전을 징수, 그 동으로 전문적 대리인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개혁은 근본적으로는 지주제를 부정하지 않으며,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이를 옹호하는 정책이었으나, 눈앞의 이익을 삭감당한 대지주, 대상인, 고리대금업자 등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들은 왕안석의 개혁을 지지하는 신법당과 구별, 구법당으로 부른다.


신종은 이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왕안석을 잠시 지방장관으로 좌천시키기도 했다. 그후 왕안석은 재기용되었으나, 그의 뜻을 펼치기에 지주관료들의 세력은 너무나 완강했다.

 

거기에 출세에 눈먼 여혜경의 변신, 개인적으로는 동생과 아들을 연이어 잃는 슬픔도 겹쳐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강녕(남경)의 종산에 은거했다.


구법당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사마광, 구양수, 소동파 등이 있다. 그중에도 <자치통감>의 저자이자, 지주관료들로부터 '살아 있는 부처'로 칭해졌으며, 신동으로 불리었던 어릴 적의 일화를 담은 <소아격옹도>의 주인공, 사마광이 대표적 인물이다.


사마광은 왕안석보다 두 살 위로, 강남 출신의 신흥관료였던 왕안석과는 달리, 대대로 진사를 내었던 화북의 대표적인 지주관료 출신이었다.

 

왕안석(좌)과 사마광(우)

 

당시의 중앙고관은 화북 출신의 전통 지주관료들, 즉 구법당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한편, 11세기 전반에는 강남의 눈부신 발전을 배경으로 강남 출신의 신흥관료의 진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으니, 왕안석의 개혁은 그와 같은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1085년 개혁의 군주였던 신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 사마광이 재상으로 등용, 모든 신법은 폐지되고 개혁은 원점으로 돌아갔으며, 당쟁의 깊은 골만 남게 되었다. 이듬해, 왕안석은 종산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으니, 그때의 그의 나이 6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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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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