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39. 과거제의 정착과 사대부 계층의 성장

지주-전호제의 확대(11세기)


송대의 황제 독재권의 확립과 문치주의의 강화는 문관의 수요를 증대, 문관 등용의 관문인 과거제를 정착시킴으로써, '가문'보다는 '실력'을 중시하는 보다 평등한 사회가 열리게 되고, 과거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게 된 신흥지주층, 즉 학자적 관료, 다시 말해서 사대부 계층이 이후의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남송의 주자에 의해 그들의 이념으로 정리된 성리학은 정통학파로서의 흔들리지 않는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위진 이래 당대까지의 사회 주도층이었던 전통 문벌귀족들은 보다 개인적인 부력에 의존, 가문 대대로의 세습적인 지위를 누렸다. 


이를테면 당대의 명문강인 안진경의 가문을 더듬어올라가면 위진 시대의 대문벌을 만날 수 있다. 왕조가 여러번 바뀌었어도 지방의 토착 대부호로서의 그들의 지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관리는 '시험'에 의해 선발되는 것이 아니라, '추천'에 의해 등용되었다. 한나라의 향거이선제가 있었지만, 위나라에서 처음 시작한 주품중정법이 이후의 문벌귀족 사회의 토대를 마련했다. 


구품중정법은 구품관인법이라고도 불리는데, 주, 군 단위로 그 지방 출신의 중정관을 두어, 관애의 우수한 인재를 1품에서 9품까지 나누어 추천케 한 다음, 등급에 따라 관직을 주는 것이다. 


중정관은 지방의 유력자와 협의하게 되고, 가문의 우열이 관품의 근거가 되니, (상품에 한문 없고, 하품에 세족 없다)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과거제는 수나라 때 처음 실시되고, 당나라 때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당나라 때의 과거에는 명경, 진사, 수재 등 여러 과목이 있었으나, 그중 진사과가 가장 주목되었다. 


지방의 향시에서 합격한 인재들은 중앙에 모여 예부에서 행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고, 그후에도 이부에서 실시하는 신언서판, 즉 외모, 언어, 필적, 소송판전 등의 까다로운 절차가 남아 있었다. 


이부는 당대 제일의 명문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난한 가문의 진사가 이 관문을 통과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것이었다. 한유와 같은 대 문호도 세 번이나 실패했다.


973년 송태조는 과거의 최종단계에 새롭게 전시를 추가했다. 전시란 임금이 직접 시험장에 나가 진사의 서열을 결정하는 것으로, 이때의 성적이 진사의 임관, 승진을 좌우했다. 이에 합격한 진사는 감격하여 임금에의 충성을 맹세하게 되고, 황제의 지위는 더욱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당말 오대의 대변혁기에 몰락했던 전통귀족 대신, 새로이 성장하고 있던 재지 지주층들이 과거를 통해 대거 관계에 진출, 새로운 지배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들은 당 중기 이래 절도사의 지배하에 들어가 관청사무를 보좌하고, 몰락한 농민들을 자신들의 장원에 흡수하면서 서서히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태조 때 수십 명에 불과하던 과거 합격자는 점차 수백 명으로 확대, 과거제는 관리등용의 중추적인 지위를 확립했다. 새로이 등장한 신흥 지주관료들의 재력은 고위관직을 획득함으로써 가장 확실히 보장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뒷날 치열한 당쟁이 벌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피지배계층은 당대에는 천민과 양민으로 대별되어 있었으나, 송대에는 대부분의 노비, 부곡민이 해방, 양민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신흥 지주관료들도 법적으로는 같은 양민의 신분에 속했다.


양민은 농지를 소유한 주호와 소작인인 객호로 구분되었는데, 객호가 대체로 전체의 1/3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호는 자산액에 따라 5단계의 호등으로 나뉘어졌는데, 그 상등호가 형세호, 혹은 관호라고 불리는 지주적 신분에 속했고, 4, 5등급의 하등호는 이들 지중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영세 농민층으로 그들이 주호의 과반 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호는 국가의 조세부담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이들 하등호의 생활이 반드시 객호보다 나았던 것은 아니었으며, 점차 객호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대체로 송대의 사회는 지주-전호의 관계로 정착되었다. 형세호는 관계에 진출, 관직을 이용해 장원을 더욱 확대해나갔다. 


국가는 주호의 몰락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왕안석의 개혁이 실패했듯이. 남송기에 이르러 지주관료의 지배력은 더욱 굳어지고 전호의 신분은 농민들의 더욱 일반적인 생활 양태가 되었다.


12세기 남송의 주희는 불교와 도교의 심각한 도전을 맞아 유교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전통 훈고학을 탈피,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이윽고 이상적 도학정치를 이루는 실천의 학문으로서의, 또한 우주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사변철학으로서의 성리학을 개창, 과거를 통해 위정자가 되려는 사대부 계층을 이사을 일반화시키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당시의 법률 또한 지주계층의 이익을 반영하고 있다. 11세기 후반의 형법에 의하면, 지주가 전호에 대해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 죄가 장죄 이하일 경우에는 아예 처벌되지 않고, 도형 이상인 경우에는 일반인보다 한 등급 감형되었다. 


남송 초기가 되면 다시 한 등급을 더해, 즉 합계 2등급이 감형되었다. 반대로 전호가 지주에게 죄를 저질렀을 때는 2등급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객호는 노예처럼 매수되지 않지만 주호가 전호를 살리고 죽이는 것이 개돼지만도 못하다)라는 표현이 나오게 되고, 농민들의 집단적인 저항, 즉 항조 운동이 개시되었다.


흔히 전호를 서양 중세의 농노에, 형세호를 영주에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호가 이전의 자유가 제한되고, 법률상의 차별대우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 예속성은 인신적이라기보다는 더욱 경제적인 것이었다. 


지주가 사회의 지배층이었으나, 그들은 봉건적 통치기구, 불수불입의 특권을 갖고 있지 못했고, 관료화하여 국가권력에 몸담음으로써 지배력을 유지, 확대하고 있었다. 중국에 있어서 국가, 국가조직의 존재는 중국의 장구한 역사 속에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선, 마치 거대한 바위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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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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