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100장면 - 37. 채소를 사 먹는 농민

산업의 대약진(10세기 전후)



현행 중학교 1학년 사회 교과서를 보면, 현대 중국의 농업은 화북지방은 밀, 조, 수수 등의 밭농사 지대, 화중, 화남지역은 벼, 보리가 주로 생산되는 세계적 벼농사 지대로, 특히 화남지방에서는 벼의 2기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농업생산기술의 전반적 진전에 따른 이러한 농업생산의 지역적 분화가 이미 10세기를 전후한 시기, 즉 당말 오대 송초에 이루어져 중국사회 전반의 대변혁을 초래했다.


진종(997년 즉위)때의 중신이었던 장영이란 이가 처음 진사에 급제, 산간 도지인 숭양현 지사로 발령되었다. 어느 날, 그는 고을 안의 시장에서 채소를 사들고 돌아오는 농민을 발견하고 개탄해 마지않았다.


'농사꾼이 시장에서 채소를 사다 먹다니 고약한 일이로다. 필시 게으름뱅이 농사꾼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사해본 결과, 고을 근교 일대에는 그같은 채소를 재배하는 농민이 없었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체계적인 농서로서 현종 최고의 노서인 <제민요술>에 의하면, 6세기경의 화북에서는 주곡은 아직 조였으며 조와 밀의 재배는 별개의 농지에서 1년 1모작의 형태로 재배되었다. 


그러나 당대 이후 밀의 분식이 널리 성행, 대규모 제분업이 출현하게 되었으며, 이 무렵이 되면 밀이 주곡으로서의 위치를 확립, 같은 농지에서의 밀과 조의 2년 3작의 농법이 출현했으며, 이후 화북의 농업의 기본적인 형태로 정착했다.


화중, 화남지역의 벼농사는 더욱 획기적인 발전, 1세기 만에 생산량이 배가되고,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를 수반했다. 나라 경제와 국가재정의 중심은 이제 명백히 강남지대로 이행, '소호사 풍년이 들면, 천하가 족하다'라고 하는 속담이 생겼다.


대체로 남조기까지 강남의 벼농사는 파종 전에 잡초를 모두 태워 버리고 볍씨를 직접 뿌리는, 그리고 1년 휴한을 수반하는 농법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이 무렵에는 모내기법, 인분, 퇴비, 참께 찌꺼기 등을 자연 비료로 사용하는 시비법, 저습지대의 기름진 진흙을 농토에 넣는 객토법 등의 기술이 크게 확대되고, 용골차로 불리는 관개용 수차를 비롯한 각종 새로운 농구가 출현, 생산기술의 비약전인 발전을 보였다. 


이에 따라 벼와 보리의 1년 2모작이 널리 시행되었고, 화남에서는 벼의 1년 2기작이 시작되었다. 벼의 품종도 다양화되고, 특히 베트남 남부에서 유래, 그 지명을 딴 점성도가 도입, 점차 도시 하층민의 식량으로 널리 거래되기 시작했다.


또한 우전, 위전, 호전 등으로 불리는 농경지가 크게 확대, 벼의 생산량이 급증했다. 가령, 남경 부근 하천의 주요 범람원에 대규모 제방이 설치되니 제방 안쪽으로 너른 농토가 생겨났다. 


소주에 인접한 태호로부터 양자강 하류의 저습지대에는 크리크를 통해 배수하고, 파낸 흙으로 제안을 쌓아 수전을 보호했다. 또 호수나 소택의 일부를 제안으로 에워싸 수전화하기도 했다.


농업생산의 비약적 발달과 지역적 분화는 점차 자급자족적 단계에서 상품생산의 경향을 띠기 시작했고, 쌀과 보리까지 광범한 물자유통 과정에 편입되면서 상업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대중적인 수요의 증가에 따라 각종 수공업이 농업에서 분리, 지역 특화 산업으로 발전했으며, 여기에 해상무역이 크게 발달, 차, 비단, 도자기로 대표되는 중국 산물의 생산 또한 크게 고무되었다.


차는 본래 인도의 야생식물이었으나, 중국에 전래되어 처음에는 약용으로 쓰이다가, 삼국의 오나라에서 기호식품으로 사용하기 시작, 점차 일반화했다. 


당 중기에 이르면 <다경>이라는 책자가 발간 될 정도로 일반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송대에는 대중적 음료로서의 지위를 확립, 차의 재배는 중요한 산업으로 자리잡았으며, 중국의 대표적인 산물이 되었다. 


차의 맛에 한번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 맛을 잊지 못했다. 거란 등 북방 유목민족들도 차를 몹시 즐기게 되어차를 수입하고 말을 수출했다. 복건, 강서, 사천 지방에는 차의 재배를 전업으로 하는 농가가 속출했다.


견직물은 여전히 중국의 대표적인 대외 수출품으로서, 또한 중요한 내수용품으로서 생산량이 급증했다. 


비단은 중국귀족들의 수요를 충당하는 화북지방의 최고품으로부터, 신흥 도시민, 중소지주, 중소상인을 겨냥한 강남의 하급품 등으로 분업, 대량생산되기 시작했다. 12세기경에는 면화도 재배, 중국의 직불자원을 추가시켰다.


특히 도자기업이 송대에 커다란 발전을 보여, 가히 황금시대를 창출했다. 북송기에는 정요, 여요, 관요, 가요, 균요 등 화북의 이른바 5대 도요지가 이름을 날렸고, 남송기가 되면 강남의 경덕진과 용천 등이 요업의 중심지로 각광, 중국 도자사상 최고수준의 청자와 백자를 생산했다. 대중적 수요에 상응한 일용품의 대량행산도 시작되었다.


또한 오늘날 하북성 제일의 요업지로 각광받는 자주요의 도자기는 석탄을 동력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석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중국인들에게 알려져 있었고, 당말부터 연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송의 수도 변경에는 어느 집이고 석탄을 사용하지 않는 집이 없었다고 한다.


이런한 산업 전반의 놀라운 발전을 동력으로 송대의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의 발달이 반드시 일반민의 생활향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다. 


생산의 증진 속에 농민간의 계층 분화가 더욱 촉진, 송대의 일반적인 지주-전호제가 확립되었다. 신흥 지주층이 대규모 수리 관개공사를 주도한다든가, 소 등의 가축, 혹은 용골차 등의 새로운 농구를 독점하면서 새로이 성장, 위진 이래의 문벌귀족에 대신하는 송대의 새로운 지배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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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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