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71. 중국혁명의 아버지 손문
-신해혁명 발발(191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09년/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총살
1910년/한일합방, 조선총독부 설치, 토지조사령 발표
거대한 중국대륙에서도 혁명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러, 일전쟁이 예상을 뒤엎고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중국의 청왕조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서태후는 일본의 승리는 일찍이 입헌군주제를 채용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마지못해 입헌군주제를 도입했다. 그리하여 1908년 헌법대강을 발표하고 1911년 최초로 내각을 소집했다.
그러나 이 내각은 만주족 출신의 황족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한인들의 불만을 샀고, 입헌군주제 아닌 공화정을 수립하려는 혁명운동이 드높아갔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손문은 1866년 광동성 향산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홍수전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제2의 홍수전으로 자처했다.
13살 때 맏형을 따라 호놀룰루로 간 손문은 1894년 그곳에서 흥중회를 조직했다. 이듬해 청, 일 전쟁이 일어나자 손문은 광동에서 청왕조 타도를 내걸고 봉기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후 손문은 미국, 영국을 두루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그의 삼민주의는 이때 골격이 완성되었다.
삼민주의란 민족, 민권, 민생주의를 말하는데 정치적 독립, 왕정타도와 공화정 수립, 경제조직의 개혁을 뜻한다. 삼민주의는 신해혁명을 이끈 지도이념이 되었다.
1905년 러, 일전쟁이 일어나자 손문을 동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흥중회, 광복회, 화흥회를 발전적 해체하고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 총재가 되었다. 중국혁명동맹회는 새로운 중국의 이름을 '중국화민국'으로 정했다.
동맹회는 기관지 (민보)를 발행하여 삼민주의를 선전하는 한편, 회원을 국내로 보내 활발한 조직활동을 폈다.
1911년 10월 9일 한구의 러시아 조계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혁명당원이 비밀리에 만들고 있던 폭탄이 터진 것이다. 다음날인 10월 10일 무창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 중 혁명운동에 가담하고 있던 병사들이 거사를 하고 이에 혁명당원들이 가세, 무창을 점령했다. 이를 '무한봉기'라 한다.
이를 계기로 혁명운동은 각지로 번져, 한 달도 되기 전에 14개 성이 독립을 선언했다. 각 성 대표들은 남경에서 회의를 열고 중화민국 임시정구 조직대강을 가결했다.
그때 미국에 있던 손문은 급히 귀국, 이듬해 1월 1일 남경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이를 신해혁명이라 한다. 이후 10월 10일은 쌍십절이라 하여 중화민국 건국기념일이 되었다.
한편 청왕조는 화북지방의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북양군벌 원세개에서 혁명군을 물리쳐줄 것을 청했다. 원세개는 야심에 찬 인물이었다. 그는 내각총리 자리에 올라 전권을 장악하고 혁명군과 비밀리에 협상을 벌였다.
그때 혁명군은 심한 재정난에 빠져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남경정부가 위태롭다고 판단한 손문은 어쩔 수 없이 원세개오 밀약을 맺었다. 청조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세우되 원세개를 초대 대총통으로 추대한다는 조건이었다.
혁명군과의 타협에 성공한 원세개는 청조에 압력을 가하여 마침내 1912년 2월 황제인 선통제를 퇴위시키고, 3월 10일 임시 대총통이 되었다.
그러나 원세개는 혁명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1913년 10월 정식 대총통에 취임한 뒤 국민당 해산령을 내려 사실상 국회를 정지시켰다. 그의 야심은 제정을 부활시켜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야심에 찬 계획은 혁명세력의 반발로 성공하지 못했다. 원세개는 제정취소를 포고하고 1916년 6월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후 약 10년 간 중국은 군벌들이 할거하는 혼란기를 맞았다.
손문은 중국공산당과 제휴, 국민당을 개편하고 제1차 국공합작을 이루었으며, 군대를 길러 군벌 축출을 꾀했다.
그러나 손문은 혁명 완수를 보지 못하고 1925년 3월 12일 60세를 일기로 북경에서 사망했다. 병으로 인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무릇 40년간을 국민혁명에 힘써온 목적은 중국의 자유평등을 구하는 데 있었다...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중을 환기시키고 또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으로 대하는 민족들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분투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현재까지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동지들은 내가 저술한 건국방략, 건국대강, 삼민주의와 제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에 의거하여 계속 노력하여 목적을 달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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