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70. 피로 물든 페테르스부르크
-러시아, 피의 일요일 사건(1905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05년/을사보호조약 체결
1906년/일본, 통감부 설치
1907년/헤이그 밀사 사건. 고종 퇴위
1905년 1월 9일 일요일,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자와 그 가족 20만명은 평화적 행진을 시작했다. 이들의 목적지는 차르(제정 러시아 때 황제의 칭호)가 사는 동궁이었다.
성상과 차르의 초상화를 앞세우고 찬송가를 부르며 행진하는 이들을 보고 구경꾼들은 가슴에 성호를 그었으며, 경찰은 교 통정리를 해주었다.
이들은 자비로운 차르에게 자신들의 굶주림과 고통을 호소하러 가는 길이었다. 선두에서 이끄는 사람은 가폰 신부였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폐하, 저희 성 페테르스부르크의 노동자와 주민들... 처자식과 늙은 부모들은 진리와 보호를 구하기 위해 폐하께 갑니다. 저희들은 거지가 되었으며, 억눌려 살았으며, 숨이 넘어가고 있나이다....저희가 요구하는 것은 일하는 시간을 하루 여덟 시간으로 줄여달라는 것, 일당을 최소한 1루불만 달라는 것, 규정시간 이외의 노동을 없애달라는 것이 고작이나이다....저희들은 여기서 마지막 구원을 바라고 있사오니 신민들에 대한 도움을 거부하지 말아주십시오....'
노동자 대열은 동궁 앞 넓은 광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장한 군대와 바리케이드였다. 노동자들은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광장은 총성에 뒤덮였다.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쓰러지고 대열은 흩어졌다. 도망치는 사람들의 뒤를 기마대가 쫓았다. 광장에 쌓인 하얀 눈 위에 사람들의 흘리 피가 붉게 물들었다.
사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발포 소식을 듣고 흥분한 군중과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군대의 야만적 행동에 비난을 퍼부었다. 다시 발포, 그리고 붉은 피. 정부는 사망자 96명, 부상자 330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이날 죽어간 사람은 500명 이상, 부상자는 수천 명에 달했다.
가폰 신부는 국외로 달아나 차르에게 저주 섞인 편지를 보냈다.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순결한 피는, 오! 영혼의 파괴자인 그대와 러시아 민중 사이에 영원히 가로놓여 있을 것이다. 그대와 그들 사이의 도덕적 결속은 다시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흘러야할 그 모든 피가, 살인자여, 그대와 그대의 가족에게 흘러 떨어지리라'
한편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슬픈 날이다. 노돈자들의 동궁에 들어오려 했을 때, 성 페테르스부르크에서는 중대한 무질서 사태가 발생했다. 여러 곳에서 군대는 발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 이 얼만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사람들은 이날을 '피의 일요일'이라 불렀다. 당시 러시아 민중은 차르의 전제정치 아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은 짐승에 가까운 생활을 했으며, 노동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고, 더럽고 비좁은 방에서 남녀노소가 뒤엉켜 먹고 자야 했다. 콜레라, 티푸스 등 전염병과 직업병에 시달렸으며, 공장주는 제멋대로 임금을 지불했다.
게다가 1904년 1월 시작된 러, 일 전쟁은 민중들의 생활을 한층 곤란에 빠뜨렸다. 물가가 폭등하여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25%가량 떨어졌고, 징집으로 일손이 달린 농촌의 불만도 높아졌다.
1904년 12월,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가장 크고 오래 된 프티로프공장 노동자들은 회사에 요구안을 제출했다. 공장주는 요구를 들어 주기는커녕 주동자 4명을 해고해버렸다.
1905년 1월,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다른 공장들도 이에 동조, 파업은 페테르스부르크시 전체로 확산되었다. 이 4명은 가폰 신부가 이끄는 '페테르스부르크 공장노동자 동맹'의 회원이었다.
노동자들은 가폰 신부에게 '자비로우신 아버지 차르'에게 자신들을 데려다달라고 부탁했다. 가폰은 차르에게 비밀편지를 보내 사실을 알리고 자비를 구했다. '피의 일요일'사건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가폰 신부는 원래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는 노동자들을 모아 도박 안하기, 술주정뱅이 없애기, 한가한 시간을 합리적으로 보내기, 종교적, 애국적 사상의 고취, 노동조건과 노동자 생활 개선 등 등의 합법적 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활동은 혁명가들로부터 노동자를 떼어놓아 노동운동을 온건한 것으로 만들려는 당국의 의도에 아주 적합했기 때문에 당국은 그의 조직활동을 묵인할 뿐만 아니라 지원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피의 일요일'사건으로 노동자들은 차르가 그들의 '자비로운 아버지'가 아니라 '잔인한 압제자'임을 깨달았다. 자비를 구하러 왔다가 총탄세례를 받은 이들은 차르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났다. 차르의 총탄이 죽인 것은 바로 러시아 민중들이 오랫동안 품어 온 차르 자신에 대한 존경과 신뢰였다.
총파업이 러시아 전역으로 불붙듯 번져나갔다. 모스크바, 리가, 바르샤바, 티플리스 등등 1905년 1월에만 44만 명이 파업에 참가, 차르의 전제통치와 싸웠다. 이는 지금까지 수십 년간 파업에 참여한 숫자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후 약 1년간 러시아는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니콜라스 2세는 마침내 굴복하고 '10월 선언'을 발표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 설립, 사상,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를 약속했다.
그러나 '10월 선언'은 속임수였다. 차르는 노동자들의 열기가 식은 틈을 타서 무력진압에 나섰다. 이에 노동자들이 재차 봉기하자, 또다시 무차별 사격으로 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1906년 악명 높은 반동 정치가 시톨리핀이 수상이 됨으로써 '피의 일요일'로 시작된 혁명은 실패로 마감되었다. 차리즘이 무너지려면 아직도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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