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68. 노벨 상을 탄 최초의 여성, 퀴리 부인
-퀴리 부부, 라듐 발견(189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선느
1897년/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침
1898년/서울, 전차 개통,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개최.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 처형
1899년/경인선 개통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 퀴리 부인의 처녀 시절 이름이다. 그녀는 1867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과학 교사였기 때문에 마리아는 학교 사택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마리아가 10살 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공직은 모두 러시아 인이 차지하고, 학교에서는 러시아 말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마리아는 1남 4녀 중 막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수입의 대부분을 언니 브로냐의 학비로 부쳐주었다. 브로냐는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 틈틈이 젊은이들이 당국의 눈읖 피해 몰래 갖는 모임에 참석, 철학, 사회학, 자연과학 등을 공부했다.
1891년 마리아는 오랫동안 고대하던 프랑스 유학의 길에 올랐다. 파리 소르본 대학 이학부에 들어간 마리아의 생활은 몹시 고달팠다. 프랑스 어에 자신있었던 그녀였지만, 빠른 말씨로 진행되는 강의를 제대로 알아듣기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독학으로 공부한 수학과 물리학 지식으로는 도저히 다른 학생들을 쫓아갈 수가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쪼들렸다. 다락방에 세든 그녀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웬만한 추위에는 불을 때지 않고 견뎌냈다. 몹시 추운 날이면 세면기의 물이 꽁공 얼어붙었다. 몇 주일 동안 빵과 물만 먹기도 했으며, 차만 마시면서 몇 끼를 굶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좌절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했다. 그 결과 1893년 물리학 학사시험에 1등, 이듬해 수학 학사시험에 2등으로 합격했다.
그 무렵 마리아는 피에르 퀴리를 만났다. 피에르는 그녀보다 8살 위로, 이미 명성을 얻은 물리학자였다. 두 사람은 1895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마리아는 더욱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 독일의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했다. 그리고 1896년에는 프랑스 물리학자 앙리 베크렐이 방사능을 발견했다. 그러나 방사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마리아는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 테마로 삼았다.
마리아는 우라늄보다 훨신 활성적인 다른 물질이 있어 거기서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노력이 필요했다. 피에르와 마리아는 실험과 연구에 몰두했다.
1898년 6월 말, 두 사람은 우라늄보다 방사능 강도가 330배나 높은 새 원소를 발견했다. 마리아는 여기에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폴로늄을 제거했는데도 여전히 강한 방사능이 남아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또다른 미지의 원소가 있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실험을 거듭, 마침내 우라늄의 900배에 달하는 방사능을 함유한 원소의결정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 우리는 방사능을 지닌 물질에는 새 원소가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 새 원소에 라듐이란 이름을 붙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
퀴리 부부가 제출한 보고서를 받은 학회는 발칵 뒤집혔다. 두 사람은 라듐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피에르가 근무하는 공업물리화학 학교의 바라크 건물을 빌려 실험실로 꾸몄다. 그후 4년간 마리아는 그곳에서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우라늄 광석을 20kg씩 꺼내어 체로 걸러서 불순물을 제거한 다음 분쇄하여 진한 황산으로 조려서 침전시켜 결정을 만드는 일을 수십 수백 번 반복했다. 너무나도 고된 중노동이었다.
마침내 1902년 두 사람은 순수한 라듐 결정을 추출해냈다. 4년의 세월을 바쳐 8톤의 광석에서 추출한 양은 겨우 0.1g이었다. 그녀의 나이 34살 때였다.
1903년 퀴리 부인은 지금까지의 연구를 총괄, '방사성 물질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을 파리 대학에 제출했다. 파리 대학은 그녀에게 이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그해 11월 스웨덴에서 한 통의 전보가 왔다. 퀴리 부부와 베크렐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한다는 내용이었다. 노벨 상이 생긴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퀴리 부인은 여성으로서 노벨 상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렇지만 퀴리 부부는 수상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 유에서였다.
그러던 중 1906년 남편 피에르 퀴리가 마차에 치여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슬픔에 잠길 틈도 없이 마리아는 남편 대신 파리 대학 이학부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여성으로서 이 학교 강단에 선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39살이었다.
방사성 원소 라듐의 발견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20세기 원자력 시대는 라듐 발견으로부터 시작된다.
퀴리 부인은 1911년 또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여, 노벨상 2회 수상이라는 빛나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방사선 치료반을 조직, 치료에 나섰다. 그후 파리 대학 라듐 연구소를 창설하고, 원자력 연구기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1934년 7월, 67살의 나이로 퀴리 부인은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악성빈혈, 오랜 세월 방사능에 노출된 채 연구에 몰두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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