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69. 제국주의 대열에 뛰어든 일본

-러, 일 전쟁 발발(190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02년/서울-인천 간 장거리 전화 개통, 최초의 하와이

1904년/한일의정서 체결

  


1904년 2월 8일, 일본은 만주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함대를 기습공격했다. 선전포고도 없이 갑자기 감행된 이 공격으로 약 1년 반에 걸친 러, 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러, 일 전쟁은 만주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싸움이었다. 제국주의 러시아와 이제 막 제국주의 대열에 끼어든 신흥 일본간의 힘겨룸이기도 했다. 


일본은 1853년 미국에 의해 개국되었다. 함대를 앞세운 전형적인 강제 개국이었지만, 그후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란 정부 주도의 근대화 정책이 성공을 거두어 유럽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했다. 


일본이 눈독을 들인 것은 중국과 조선이었다. 1876년 일본은 자기들이 미국한테 당한 방식 그대로 조선을 개국시켰다. 군함과 대포를 거느리고 강제로 조약을 맺게 한 것이다. 이것이 강화도 조약이다. 


그러나 조선을 자신의 조공국으로 여기고 있던 청나라가 이를 가만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조선은 중국과 일본의 팽팽한 대결장이 되었다. 


1894년 일본은 마침내 청나라와 일대 결전을  벌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정권유지에 불안을 느낀 민씨 정권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것을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일본은 서둘러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명분은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은 청의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기 위한 군사행동이었다. 


동학혁명군은 외국군대를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자진해산했다. 그러나 청, 일 양군은 철수하지 않고 내정개혁을 빌미삼아 날카롭게 대립, 드디어 1894년 8월 전쟁을 시작햇다. 청, 일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승리는 일본에게 돌아갔다. 공업화와 군비증강에 힘써온 일본을 청나라는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양국은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요동반도, 대만, 팽호열도를 넘겨받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일본의 세력팽창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함께 요동반도를 중국에 돌려주도록 압력을 가해왔다. 일본은 하는 수 없이 이에 응했다. 이 사건을 '삼국간섭'이라 한다.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에게 새로운 장애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발칸 반도로의 진출이 막히자 극동지방으로 눈을 돌려 만주와 조선으로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삼국간섭의 대가로 만주 동청철도 부설권을 따낸 러시아는 1898년 여순, 대련의 조차권을 얻었으며,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18만 명의 군대를 파견, 만주를 장악했다. 


한편 조선에서는 친러 정권이 들어서 일본세력이 위축당하고 있었다.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고종의 황후 민씨를 살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약 1년간 정무를 보았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하는데, 이후 조선에는 박정양을 수상으로 하는 친러 정부가 들어서고 러시아의

보호국처럼 되어버렸다. 


그 동안 러시아는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경원, 종성의 채광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온갖 이권을 차지했다. 그리고 1903년에는 압록강 유역의 삼림채벌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한만 국경의 요지인 용암포에 군대를 파견, 이곳을 조차지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용암포 사건'이라 한다. 


러시아의 남하에 불안을 느낀 일본은 1902년 영국과 손을 잡고 영,일 동맹을 맺었다. 그 내용은 '일본은 청나라에 대한 영국의 이권을 인정하며, 영국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특수권익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1904년 2월, 러시아가 만주 철병을 하지 않자 일본은 협상을 제의했다. 한반도와 만주를 나누어 갖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의 여순항 기습공격이 감행되고 양국은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5월, 일본군은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남산, 대련을 점령하고 이듬해 1월 여순을 함락시켰다. 3월에는 봉천에서 러시아 군을 대패시키고, 5월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 연합함대는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했다. 


승리를 확신한 일본은 재빨리 미국에 중재를 요청했다. 러시아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국내의 고조된 혁명운동 때문에 장기전을 벌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한편 일본은 종전을 앞두고 미국과 비밀협약을 맺었다. 즉, '일본은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독점권익을 인정하고 대신 조선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을 인정받는다'는 내용이다.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 태프트 육군장관 사이에 맺어진 조약이므로 이를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 한다.


또 영국과 영, 일동맹을 개정하여 같은 내용을 승인받았다. 이처럼 사전준비를 완료한 뒤 1905년 9월,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일본은 강화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한반도 지배권과 요동반도, 사할린 남부가 일본에게 넘겨졌고 오호츠크 해와  베링 해의 어업권이 일본에게 양도되었다. 


경쟁자를 몰아낸 일본은 그해 10월 을사 보호조약을 체결,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며, 1910년에는 식민지로 합병했다. 그런 다음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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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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